자정전(資政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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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경희궁인 경덕궁의 편전이며, 숙종과 영조의 빈전으로 사용된 전각.

개설

자정전은 1616년(광해군 8)에 새문동에 별궁으로 조성된 경덕궁의 편전이다.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창경궁이 모두 소실되어 왕이 머물 궁궐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1608년(선조 41)이 되어서야 비로소 궁궐의 복구공사가 시작되었고 창덕궁은 1610년(광해군 2)에 완공되었다. 창경궁의 공사는 1616년에 어느 정도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광해군은 완공된 창덕궁과 창경궁으로 이어하기를 꺼려하였다.

풍수지리가의 말을 듣고 광해군은 1616년부터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을 짓기 시작하고, 새문동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에 경덕궁을 새로 지었다. 인경궁은 궁궐의 규모가 매우 크고 화려하여 공사가 늦어졌으나 경덕궁은 1620년(광해군 12) 11월에 거의 완공되었다. 1623년(광해군 15)에는 인경궁 공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대규모 궁궐 공사는 광해군의 실정(失政)으로 꼽혔는데, 대규모 궁궐 공사의 상징이 인경궁이었기 때문에 인조 즉위 이후 인경궁은 철거되었다. 경덕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의 집터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철거되지 않고 서궐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덕궁에는 편전이 두 개 있었는데 자정전과 흥정당(興政堂)이다. 자정전은 정전과 연결되어 외전에 속하는 편전이며, 흥정당은 내전에 소속된 편전이라 볼 수 있다.

인조가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괄의 난으로 다시 창덕궁과 창경궁이 소실되자 인조는 경덕궁을 사용하였다. 1624년(인조 2)에는 경덕궁에 거처하는 동안 자정전을 편전으로 활발히 이용하였다(『인조실록』 2년 2월 23일). 자정전에서 신하를 만나 정사를 논하고 경서를 강독하였으며 상참을 행하였다. 또 숙종과 영조는 창덕궁과 함께 동궐과 서궐을 자주 옮겨 다니며 사용하였고 특히 경덕궁을 자주 사용하였다. 경덕궁은 영조 이후 경희궁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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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및 용도

자정전은 경덕궁의 정전인 숭정전(崇政殿) 북쪽에 있으며 경덕궁의 지리상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광해군이 영건한 경덕궁에는 편전이 두 개 있다. 바로 자정전과 흥정당이다. 자정전은 정전의 뒤쪽에 위치하고 대외적인 의례와 관계되는 편전이라면, 흥정당은 침전인 융복전(隆福殿)과 회상전(會祥殿)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왕이 편안하게 신하를 만나고 경서를 읽을 수 있는 곳이었다. 경덕궁을 자주 활용한 왕은 인조와 숙종, 영조였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각이 소실되자 경덕궁을 사용하였다. 주로 1624년(인조 2)부터 10년 동안 자정전에서 오전 다섯 시에서 일곱 시[卯時]까지 조강(朝講)을 행하고, 오전 열한 시에서 오후 한 시[午時]까지 주강(晝講)을 하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또 1625년(인조 3)에는 경덕궁 경현당(景賢堂)에서 원자의 관례를 행하고 자정전에서 왕께 조알(朝謁)하는 의례를 행하였다(『인조실록』 3년 1월 21일).

숙종과 영조가 경희궁에서 승하하자 경희궁의 편전인 자정전에서 빈전 의례를 행하였다. 숙종은 죽기 전에, 빈전은 창덕궁의 선정전에 마련하고 혼전은 창경궁의 문정전(文政殿)에 마련하도록 하명하였다. 그러나 숙종이 경희궁에서 승하하여 시신을 창덕궁까지 옮기기 어려워 경희궁의 자정전에서 빈전 의례를 행하였다.

숙종이 경덕궁의 정침인 융복전에서 승하하자 융복전에서 시신의 사후 처리 과정으로 소렴(小殮)을 마쳤다. 5일째 되는 날 빈전으로 선정된 자정전에서 대렴(大殮)을 행한 후 자정전에 빈소를 차렸다. 시신을 담은 재궁(梓宮)은 일영문(日永門)을 통해 융복전을 나와서 서쪽에 위치한 집경당(集慶堂) 대청을 가로질러 그 뒤에 청상문(靑商門)을 지나 자정전으로 오르는 계단형 행각을 거쳐 숙성문(肅成門)에 이르러 자정전에 들어갔다. 「서궐도안(西闕圖案)」에 묘사된 청상문(淸商門)과 숙성문(肅成門) 사이는 매우 가파른 지형이며 계단형 행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빈전의 정전은 자정전으로 하고, 그 동북 행각에는 대비전(大妃殿)의 곡림청이 위치하였다. 서북 행각에는 대전(大殿)의 곡림청을 두고, 대비전 곡림청의 남쪽에는 중궁전의 곡림청을 마련하였다. 빈전 주변으로 대비전과 대전의 거처를 옮기기도 하였다. 덕유당(德游堂)은 대비가 머물고 읍화당(浥和堂)은 왕이 사용하였다. 당시 연잉군으로 있던 영조는 숭정전의 서월랑에서 직숙(直宿)하였다.

5개월 동안의 빈전 의례를 마치고 발인할 때에는 재궁을 윤여(輪輿)에 태워 숭정전까지 온 뒤 발인을 위한 곡림 의례를 행한다. 그 후에 숭정문(崇政門)에서 견여(肩輿)에 태워 흥화문(興化門) 밖까지 이동하고 흥화문에서 대여(大輿)에 태워 산릉으로 옮겨졌다. 이외에 자정전은 우주(虞主)연주(練主)등의 신주를 만들어 봉안하는 장소로 주로 사용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연주(練主)와 현종의 우주(虞主)를 자정전 월랑에서 조성하고 자정전에 봉안했다가 연제사(練祭祀)를 지내는 당일에 창경궁의 문정전으로 옮겼다. 1681년(숙종 7)에는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우주를 자정전 월랑에서 조성하고 읍화당에 봉안하였다. 또 인경왕후의 연주를 조성하고 봉안하였다. 1688년과1725년(영조 1)에도 비슷한 사례가 보인다.

변천 및 현황

1616년부터 1620년 사이에 경덕궁이 조성될 때 건립된 자정전은 영조 연간까지 잘 이용되었다. 그러나 1776년 정조가 즉위한 이후 경덕궁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고종대 경복궁의 중건이 시작되자 더욱 방치되었다. 이에 1868년(고종 5)에는 경희궁의 공터가 용동궁(龍洞宮), 수진궁(壽進宮), 명례궁(明禮宮), 어의궁(於義宮) 등의 경작지로 제공되었다. 1910년(융희 4) 한일합방이 된 후 경희궁 자리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나머지 건물들도 매각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정전은 사라졌으며, 1993년 발굴 조사가 시행되었고 현재 경희궁에 복원되었다.

형태

자정전은 경희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터가 높고 좁아 다른 궁궐의 편전 건물보다 비교적 작은 규모로 조성되었다. 건물의 정면은 3칸, 측면은 3칸으로 총 9칸으로 조성되었으며, 지붕을 받치고 있는 공포부는 익공형으로 간략하며 화반을 갖추고 있다. 자정전 주변의 마당이 좁아 뒤쪽은 담장으로 막혀 있으며, 자정전의 동서쪽에 행각이 시작되어 주변을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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