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후(崔漢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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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2년(세종 14) ~1505년(연산군 11) = 75세]. 조선 전기 세종~연산군 때 문신. 행직(行職)은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이다. 자는 자방(子房), 호는 양성재(養性齋)·규암(圭巖)이다. 본관은 화순(和順), 주거지는 경상도 금릉(金陵: 김천)이다. 아버지는 공조 판서최선문(崔善問)이고,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는 부사(府使)김명리(金明理)의 딸이다. 증조부는 병조 참의(參議)최원지(崔元之)이고, 조부는 중부령(中部令)을 지내고 이조 판서로 추증된 최자강(崔自江)이다. 풍기군수(豊基郡守)최한공(崔漢公),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최한번(崔漢藩)이 그의 형제이다.

성종 시대의 활동

1453년(단종 1) 형 최한공과 같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469년(예종 1)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1480년(성종 11)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성종실록(成宗實錄)』 참고.) 그때 성종이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강(講)하기를 끝마치자, 지평최한후가 사간이세필(李世弼)과 함께 임사홍(任士洪)의 죄를 탄핵하고 용서하지 말도록 청하니, 성종이 말하기를, “이미 그를 용서하였으니, 추론(追論)할 수 없다.” 하였다.(『성종실록』 참고.) 만약, 성종이 임사홍의 죄를 관대하게 보아주지 않고, 최한후의 주장대로 임사홍을 파직시켜 문외(門外) 출송(黜送)하였더라면, 그 뒤에 연산군 시대 사화(士禍)의 참극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여러 화직(華職)을 거치다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 경상도 금릉의 하로(賀老)로 돌아갔다. 대개 관리들이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는 고향 가까운 고을에 수령을 자청하여 부임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는 아예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던 것이다. 그가 금릉에서 부모를 모시다가, 1483년(성종 14) 나이가 52세 때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었다고 한다. 「최한공 유사(崔漢候遺事)」에서는 그가 도승지로 부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성종실록』에서도 도승지로서 활동한 사실이 없다. 그가 만약 도승지로 부임하였다면, 그 뒤에 여러 현직(顯職)을 두루 거쳤을 것이 분명하지만, 실록에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를 보면, 그의 “도승지 발탁”은 와전(訛傳)이라고 추측된다.

연산군 시대의 활동

1500년(연산군 6)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가,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그의 나이가 70세가 되었는데, 치사(致仕)하지 않는다고 하여, 사헌부 헌납(獻納)성한(成翰)이 탄핵하기를, “최한후가 남원부사로 있는데, 남원은 큰 고을이고 최한후는 나이가 70세가 넘었으니, 반드시 그 임무를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연산군이 말하기를, “그가 비록 늙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하고, 그대로 두려고 하였다. 그때 정광필(鄭光弼)이 나서서 아뢰기를, “지금 서쪽 변방에 사변이 있는데, 남방에도 또한 장수를 뽑아 보내지 않아서, 사변이 발생하게 된다면, 남방과 북방이 모두 안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연산군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바꾸어야 하겠다.” 하고, 그를 치사하게 하였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참고.) 조선에서는 관리가 나이 70세가 되면 치사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사헌부에서 그를 탄핵한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고향 금릉으로 돌아가서 한가하게 여생을 보내려고 하였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처음에 연산군은 어머니 윤씨가 성종 때 사사(賜死)된 경위를 잘 모르고 있다가, 이때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어머니가 폐위(廢位)되어 죽게 된 전후사정을 알게 되었다. 극도로 흥분한 연산군은 <폐비(廢妃) 사건>에 관여한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김굉필(金宏弼) 등 살아있는 대신 10여 명을 사형에 처하고, 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정창손(亭昌孫) 등 죽은 여러 대신들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는데, 최한후도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505년(연산군 11) 연산군이 이극균과 관계된 사람들을 형신(刑訊)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여 다시 형신하게 하면서, 당시 대간(臺諫)들도 모조리 잡아다가 다시 형문(刑問)하게 하였다.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대간최한후 등을 다른 관례대로 형신하도록 하라. 이극균을 찾아본 사람들을 형신한 날이 오래되었으니, 다시 형신하도록 하라.” 하였다.(『연산군일기』 참고.) 이극균과 친밀하게 지낸 사람들을 조율(照律)하여 처형하고, 대간최한후 등을 배소(配所)로 도로 돌려보냈다. 그때 최한후는 75세의 고령으로서 유배지에서 돌아갔다. 그는 율시(律詩) 짓기를 좋아하여 유고(遺稿) 수천 여 수(首)가 후손에게 전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병화(兵火)에 거의 유실되고 겨우 몇 편(篇)만이 남아 있다.(「최한후 유사」 참고.)

성품과 일화

최한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솔직해서, 무슨 일이든지 알고서도 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화직을 두루 거치면서 거침없이 솔직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니, 사람들이 모두 겉으로는 존경하는 체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를 꺼렸다. 성종 시대 말년에는 어버이가 늙었다고 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부모를 모시면서 벼슬하지 않았다.

1501년(연산군 7) 그의 나이가 70세가 되었다고 하여, 연산군이 억지로 치사하게 하자, 그는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금릉 하로(賀老)로 돌아갔는데, 그의 맏형 최한공이 돌아간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그는 그의 맏형처럼 고향의 산수(山水)를 즐기면서 날마다 시가(詩歌)를 읆조리는 것으로 낙(樂)을 삼았다. 그의 형제는 율시에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고 칭찬을 받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김천의 남쪽 묵방(墨坊)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비명(碑銘)은 없고, 유사(遺事)가 남아 있을 뿐이다. 부인 풍산홍씨(豊山洪氏)는 홍재(洪載)의 딸이다. 오늘날 그의 후손들이 경상북도 김천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