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형(趙錫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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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8년(선조31)∼1656년(효종7) = 59세]. 조선 중기 인조∼효종 때의 유일(遺逸). 자는 자복(子服), 호는 근수헌(近水軒)이다. 본관은 임천(林川)인데,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판(參判)조희일(趙希逸)이고, 어머니 해주정씨(海州鄭氏)는 판관(判官)정흠(鄭欽)의 딸이다. 동부승지(同副承旨)조원(趙瑗)의 손자이고, 봉상시(奉常寺)정(正)조희진(趙希進)의 조카이다.

청소년 시기의 시련

조석형(趙錫馨)은 청소년 시기에 줄곧 아버지 조희일의 유배지를 따라 다녔다. 그는 아버지 뒷수발을 하며 7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였다. 광해군 말기 허균(許筠)이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면서,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하여, 1617년(광해군9) 사람을 시켜서 서궁(西宮)에 언문으로 광해군을 비난하는 글을 투서(投書)하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범인으로 그의 아버지 조희일을 지목하여 죄를 얽어 맞추어 평안도 이산(理山)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다. 누르하치의 후금(後金)이 침입한다는 경보(警報)가 있자, 나라에서 아버지의 유배지를 경상도 하동(河東)으로 옮겼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서 남쪽과 북쪽의 변방으로 바삐 옮겨 다녔는데, 아버지를 모시다가 풍토병에 걸려서 평생 고생하였다. 이 무렵에 아버지로부터 성리학의 가르침을 전수 받고, 또 귀양살이에서 듣고 보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꼈다. 그는 집안 형편과 나라의 혼란을 몹시 한스럽게 여겼는데, 이에 대한 영향으로 그 뒤에 평생토록 벼슬하지 않고 유일(遺逸)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인조시대 은거생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이듬해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뽑혀서, ‘3대 장원[三世壯元]’을 이루니, 사람들이 다들 부러워하고 칭찬하였다. 할아버지 운강(雲江)조원(趙瑗)과 아버지 죽음(竹陰)조희일(趙希逸)이 모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급제하였기 때문이다. 그 뒤에 그의 손자 조정만(趙正萬)과 그의 증손자 조명익(趙明翼)도 사마시(司馬試)에서 장원급제하여, 세상에 보기 드문 집안이라고 많은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대과에는 거듭 실패한 것 같다. 1631년(인조9) 인조가 성균관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이고, 삼상(三上) · 삼중(三中) · 삼하(三下)로 등급을 매길 때, 조석형은 삼중을 맞아서 과거 시험에 이분(二分)의 점수를 가산 받았으나(『응천일록(凝川日錄)』 권5 참조) 끝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음직(蔭職)으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에 임명되고, 시직(侍直)과 부솔(副率)에 승진하였으나, 모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나라가 치욕(恥辱)을 당하자, 마침내 세상에 뜻을 버리고 산림(山林)에 묻혀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는 물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호(號)를 스스로 ‘근수헌’이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 홍익한(洪翼漢) · 오달제(吳達濟) · 윤집(尹集) 3학사(學士)와 선원(仙源)김상용(金尙容)의 죽음을 전해 듣고 여러 편(篇)의 시를 지어서 애도하기도 하였다. 1637년(인조15) 역서(曆書)에 시제(詩題)를 쓰기를, “대명 정축년 숭정력이여[大明丁丑崇禎曆: 1637년], 오늘 어떻게 눈물을 닦고 볼 수 있겠는가[今日何堪拭淚看]”라고 하였는데, 사관(史官)이 이것을 사책(史策)에 실었다. 1656년(효종7) 10월 22일 병으로 죽었는데, 향년이 59세였다. 그의 시는 당시(唐詩)를 본받았고, 글씨는 진체(晉體)에 뛰어났다.

성품과 일화

조석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풍채가 우람하고 준수하였던 그는 비록 자잘하게 일일이 집안을 챙기거나 단속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집안이 매우 엄숙하게 다스려졌다. 사람됨이 청렴하여 세속을 초탈(超脫)하고, 언어가 격앙(激昻)하여 문채(文彩)가 외면에 흘러넘쳤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고, 조금 자라서는 제가(諸家)의 서적을 두루 열람하여 문장의 내용이 나날이 풍부해졌다.

일찍이 어렸을 때 아버지 조희일을 따라서 호당(湖堂)에 갔었는데, 사람들이 ‘백로시(白鷺詩)’를 지어보라고 하자, 붓을 잡고 즉시 시를 지어냈다. 그러자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과 학곡(鶴谷)홍서봉(洪瑞鳳) 등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서, “이 아이가 머지않아 마땅히 이 자리에 오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일찍이 진사시를 치르는 시험장에 놀러갔다가, 남들이 글을 짓는 것을 보고 시험지를 높이 펼쳐들게 하고 붓을 잡고 한 번 휘둘러 글을 지어냈는데, 여러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서 하나의 장관(壯觀)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여묘살이를 하느라고 거의 목숨을 잃을 뻔 하였고, 아버지 유집(遺集)을 손수 베껴 쓰느라고 손에 굳은살이 박힐 정도였다. 거상(居喪)을 마친 뒤에도 내실(內室)에 거처하지 않았고, 또한 첩잉(妾媵)을 들이지 않았다. 서모(庶母)를 봉양하고 서제(庶弟)들을 무애(撫愛)하면서 곡진하게 은의(恩義)를 베풀었다. 두 여동생이 홀몸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것을 불쌍히 여기어 그 아이들을 친자식과 같이 거두어 길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파주(坡州) 혜음리(惠陰里)의 선영(先塋)에 있고 부인과 합장하였는데,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참판(參判)김광현(金光炫)의 딸이고, 선원(仙源)김상용(金尙容)의 손녀이다.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다. 차남 군수조경망(趙景望)의 아들 조정만(趙正萬)은 형조 판서를 지냈다. 삼남 현령조경창(趙景昌)의 맏딸은 가림부부인조씨(嘉林府夫人趙氏)인데,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김주신(金柱臣)에게 출가하여 낳은 딸이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청음집(淸陰集)』
  • 『상촌집(象村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선원유고(仙源遺稿)』
  • 『월사집(月沙集)』
  • 『태계집(台溪集)』
  • 『문곡집(文谷集)』
  • 『연경재전집(硏經齎全集)』
  • 『수북유고(水北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