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한(洪翼漢)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586년(선조19)∼1637년(인조15) = 52세]. 조선 중기 인조 때 활동한 충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淸)나라에 잡혀가서 순절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 초명은 홍습(洪霫), 자는 백승(伯升), 호는 화포(花浦) · 운옹(雲翁)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토홍(土洪)이고, 주거지는 경기도 평택(平澤)이다. 아버지는 진사 홍이성(洪以成)이고,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김림(金琳)의 딸이다. 큰 아버지인 홍대성(洪大成)의 양자로 갔다. 현감홍애(洪磑)의 손자이고, 교관(敎官)홍익형(洪翼亨)의 동생이다. 월사(月沙)이정귀(李廷龜)의 문인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15년(광해군7) 30세로 사마시에 생원으로 합격하였다. 1624년(인조2) 39세에 인조가 <이괄(李适)의 반란> 때 공주(公州)로 피난하여 시행한 알성시(謁聖試)에서 장원 급제하였으나, 그가 권세가의 자손이 아니라서 시험을 주관하던 자가 방방(放榜)하면서 그의 이름을 누락하였다.(『송자대전(宋子大典)』 권213) 홍문관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감찰로 옮겼는데, 그때 주청사(奏請使)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세자시강원 사서에 임명되었다가, 고산찰방(高山察訪)으로 나갔고, 고령군수(高靈郡守)와 부안현감(扶安縣監)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부안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후금(後金)을 토벌하기 위해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으나, 조정에서 후금과 ‘형제의 관계’ 맺고 화의(和議)하였으므로 돌아왔다.

1628년(인조6)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1629년(인조7)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되었다. 이어 병조 정랑으로 승진하여 춘추관 기주관(記註官)을 겸임하였고, 1631년(인조9) 공조 정랑으로 옮겼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635년(인조13)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는데, <정묘호란> 때 후금 군사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온 강홍립(姜弘立)의 죄를 엄하게 다스리도록 청하였다.(『송자대전(宋子大典)』 권213) 1636년(인조14) 2월 후금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조선에 와서, 그들의 국호를 ‘후금(後金)’에서‘청(淸)’으로 바꾸고, 임금의 칭호를 ‘칸[汗]’에서 ‘황제(皇帝)’라고 확정하였으니 조선에서 청나라 황제의 존호를 받들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사헌부 장령이었던 홍익한은 이에 격분하여 상소하기를, “지금 만약 오랑캐를 받들어 섬긴다면, 이것은 오랑캐가 스스로 황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그들로 하여금 황제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사신을 목을 베어죽이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인조는 그의 충정은 가상하나 사신은 죽일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홍익한은 척화파(斥和派)의 대표적 인물이었는데, 화의를 주장하는 재상 최명길(崔鳴吉) 등을 만나면 얼굴을 붉히고 화해 정책을 비난하였다. 1636년(인조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은 “화의를 배척하여 오랑캐의 침략을 초래한 사람은 바로 홍익한이다. 지금 홍익한을 두고 누구에게 서로(西路)의 관직을 맡기겠는가.”하고, 그를 결원이 된 평양서윤(平壤庶尹)에 임명하여 청나라 군사를 막도록 하였다. 홍익한은 보산소성(寶山小城)을 수축하고 민병(民兵)을 모집하여 평양 방어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칸 홍타지는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의주와 평양 등을 피해 서울로 직행하였다. 그런 다음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한 인조를 포위 공격하여, 45일 만에 <삼전도(三田渡)의 항복(降伏)>을 받아내고 철수하였다. 이때 조선과 청의 화의 조건은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고, 막대한 세폐(歲幣)와 척화파의 인물들을 청나라에 보내는 것 등이었다. 그리하여 척화파로 지목된 김상헌(金尙憲)과 홍익한 · 윤집(尹集) · 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는 모두 체포되어 청나라로 압송되었다.

삼학사의 순절

1637년(인조15) 2월 12일 증산현령(甑山縣令)변대중(邊大中)이 감압관(監押官)이 되어 평양 두리도(豆里島)에서 홍익한을 체포하여 의주(義州)로 압송하였다. 변대중은 압송 중 홍익한이 도주할까 두려워하여 그의 포박을 풀어주지 않아 홍익한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였다. 은산현감(殷山縣監)이순민(李舜民)이 홍익한을 만나러 와서 그 모습을 보고 변대중에게 포박을 풀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홍익한도 “나는 죽음을 두려워해서 도망칠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으나 변대중은 포박을 풀지 않은 채 그를 압송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6) 홍익한 일행이 의주에 이르자, 의주부윤(義州府尹)임경업(林慶業)은 그를 대의(大義)를 지킨 대장부라고 하며 극진히 대접하였다. 홍익한이 의주를 떠날 때는 입었던 갖옷을 벗어 입혀 주었고, 미관첨사(彌串僉使)장초(張超)에게는 그를 심양까지 공손히 압송하도록 하였다.

만주의 통원보(通遠堡)를 거쳐 심양에 이르자 청나라 칸 홍타지는, 이미 도착해 있던 김상헌과 함께 그를 별관(別館)에 묵게 하고, 예관(禮官)을 시켜 연회를 베풀었다. 예관은 황제가 내리를 접대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였으나 홍익한은 “예절 음식”이 아니라고 하며 손도 대지 않고 물렸다. 홍타지가 사람을 시켜 그에게 잡혀온 이유를 묻자, 그는 “나는 척화를 주장한 대간(臺諫)이므로 붙잡혀 왔다.”라고 대답하였고, 다른 척화 인사에 대하여 묻자 그는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망령되게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홍타지가 용골대를 보내어 협박하고 타일렀는데, 홍익한은 용골대에게 화를 내며 “작년에 네가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네 목을 치라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나다.”라고 하였다.

그해 3월 5일 청나라 홍타지가 직접 심문하려고 그를 불렀다. 이날 그는 몸종을 돌아보면서, “칸이 반드시 나를 굴복시키려고 하지만 나는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는 대궐의 뜰 아래에서 결박당한 채, 무릎을 꿇지 않고 우뚝 서있었다. 홍타지가 맹약(盟約)을 위배하고 화의를 배척한 까닭을 물으면서 화를 내니, 그는 “너는 우리 나라와 형제가 되기로 약속을 해 놓고, 도리어 황제를 자칭하여 우리를 신하로 삼으려고 하니, 맹약을 위배한 실수가 과연 너에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있는 것인가?”라고 반문하였다. 홍타지가 말문이 막혀서 한참 동안 있다가, “우리 대군(大軍)이 나갔을 때에 어째서 맞아서 싸우지 않고 도리어 우리에게 사로잡혀 왔는가?”라고 물었다. 홍익한은 “내가 주장하는 것은 다만 대의뿐이다. 성패(成敗)와 존망(存亡)은 논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어 옷을 벗고 알몸으로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형살(刑殺)할 때에 반드시 가죽을 벗겨서 마디마디 저며서 죽인다고 들었다. 왜 빨리 이 형벌을 시행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홍타지는 이 사람은 어렵겠다라고 좌우에게 말한 다음, 그를 처형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홍익한은 심양에서 50세의 나이로 혹형을 받고 죽었다. 그는 죽기 이틀 전인 3월 삼짇날에 “양지바른 언덕에 새싹이 돋아나는데[陽坡細草拆新胎] 세장 속에 갇힌 외로운 새, 마음이 더욱 슬프구나.[孤鳥樊籠意轉哀]”라는 시를 지었다.

청나라 홍타지는 홍익한의 충성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안마(鞍馬)와 의금(衣衾) 등의 물품을 역인(譯人) 김여량(金汝亮)에게 부쳐 보내 주었다. 또 그의 몸종도 석방하였는데, 그 몸종은 그의 일기(日記)를 가지고 돌아 와 심양에서 홍익한을 따라다니면서 목격했던 사실을 증언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은 「삼학사전(三學士傳)」을 지어서 그들의 충절을 후세에 전하였다.(『송자대전(宋子大典)』 권213 삼학사전)

저서로는 『화포집(花浦集)』, 『북행록(北行錄)』, 『서정록(西征錄)』, 『조천항해록(朝天航海錄)』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홍익한은 젊어서부터 총명하고 풍채가 빼어나며, 효우(孝友)하고 충신(忠信)하였다. 평소 말하는 투가 잘 격앙(激昻)하였고, 남에게 굴복하는 바가 없었다. 언제나 사서(史書)를 읽을 때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의사(義士)들의 글을 읽으면 반드시 결연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마음으로 흠모하였다.(『송자대전(宋子大典)』 권213)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현(平澤縣) 서쪽 경정리(鯨井里)에 있는데, 시신이 없어 부부의 옷과 신발로 허장(虛葬)하였다. 송시열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褒義祠),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부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영주(榮州)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 평양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첫째부인 능성구씨(綾城具氏)는 정랑구곤원(具坤源)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고, 둘째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는 군수(郡守)허식(許寔)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병자 호란 때 홍익한의 가족은 강화도(江華島)로 피난갔다. 그러나 강화도가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당하자, 홍익한의 차남 홍수인(洪晬寅)은 청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다른 가족은 강화도를 탈출하여 교동(喬桐)으로 피신하려고 마니산(摩尼山)에서 내려와서 포구(浦口)에 이르렀다가 청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홍익한의 후처인 허씨(許氏) 부인이 욕을 보지 않으려고 저항하자, 장남 홍수원(洪晬元)이 계모를 구원하려다가 적에게 죽었다. 허씨 부인은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며느리 이씨도 자결하였다. 홍익한의 늙은 어머니와 나이 어린 두 딸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홍익한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평양에서 심양으로 잡혀갔다. 압송 도중에 그는 두 아들에게 편지를 남겨, “효친(孝親) 봉선(奉先)의 도리를 다하라.”라고 신신 당부하였다.

홍익한의 장녀는 고양군수(高陽郡守)정창징(鄭昌徵)의 아내가 되었는데, 그 아들 정제현(鄭齊賢)은 효종의 딸 숙휘공주(淑徽公主)와 혼인하여 인평위(寅平尉)에 봉해졌다. 홍익한의 형 홍익형은 벼슬하지 않고 경상도로 옮겨가서 은거하였는데, 그 아들 홍응원(洪應元)이 홍익한의 양자로 가서 그의 제사를 받들었다. 양자 홍응원은 나라의 은사(恩賜)를 받아서 의금부 도사를 지냈고, 그 아들 홍우석(洪禹錫)은 도정을 지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송자대전(宋子大典)』
  • 『병자일록(丙子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담헌서(湛軒書)』
  • 『동계집(桐溪集)』
  • 『면암집(勉菴集)』
  •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 『속잡록(續雜錄)』
  • 『순암집(順菴集)』
  • 『심전고(心田稿)』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하곡집(霞谷集)』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