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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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기관이나 사회단체 또는 개인이 업무나 일상사를 날짜별로 기록한 자료.

개설

일기는 기록에 따라서 일록(日錄), 일력(日曆), 일지(日誌) 또는 실록(實錄), 실기(實記), 록(錄), 기(記) 등으로 명명되어 전한다. 일기는 사관(史官) 제도의 정립과 궤를 같이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우리의 경우 고대에서부터 일기가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다수의 일기가 작성되어 현재 약 1,600여 종의 일기가 전한다.

현재 전하는 일기의 대부분은 개인이 작성한 것이고, 이 밖에도 국가 기관이나 사회단체 등에서 작성한 일기가 있다. 현전하는 개인 일기는 내용에 따라 생활일기, 사환일기(仕宦日記), 사행일기(使行日記), 전란일기(戰亂日記) 등으로 크게 분류된다. 국가 기관의 일기는 왕이나 세자 또는 종친과 관련된 것이거나 승정원(承政院) 등 국가 기관의 업무 일지 형식의 일기가 다수를 차지한다.

일기는 개인이나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확인하고, 일상의 생활을 해명할 수 있는 자료로써 유용하지만, 주관적이고 편협한 측면이 있어 자료 활용에 주의를 요한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일기는 한문으로 작성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남이웅(南以雄)의 처인 남평조씨가 작성한 『병자일기』와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지은 『한중록』과 같이 한글로 작성된 경우도 있다. 일기는 작성 주체에 따라 분류하면 국가 기관과 사회단체, 그리고 개인 등이 작성한 것으로 분류되며, 현재 대략 1,600여 종이 전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국가 기관에서 작성한 일기는 왕이나 세자, 종친과 관련된 것이 있고, 이 밖에도 승정원이나 예조(禮曹) 등 중앙 관청에서 작성하거나 감영(監營)이나 군현(郡縣) 등 지방 단위의 관청에서 작성한 일기가 있다. 국가 기관에서 작성된 일기는 업무 일지 또는 행사 관련 일기가 중심이 된다. 예를 들어 『승정원일기』는 왕명 전달이 주 업무인 승정원의 일기이므로, 이와 관련해서 왕에게 보고되는 문서나 왕명의 기록이 중심이 되고, 입시한 주서(注書)에 의해서 왕과 관원들이 국정과 관련해 논의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경연(經筵)과 관련된 『경연일기』는 진강(進講)의 전말과 함께 왕의 전교(傳敎)와 관원들이 아뢴 말을 주로 기록하였다(『성종실록』 6년 2월 14일).

한편 국가 기관에서 작성한 일기 이외에 궁궐에서도 별도로 일기를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 자내일기(自內日記) 또는 대내일기(大內日記)(『영조실록』 22년 5월 20일), 내일기(內日記) 등으로 표현된 일기이다.

국가 기관에서 작성한 일기는 후일 왕의 비문이나(『문종실록』 1년 4월 1일),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과정에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문종실록』 2년 2월 22일). 또한 국정의 참고 자료로 활용되거나(『성종실록』 7년 3월 11일), 특정의 인물이나 정치적 사건을 파악하는 데 활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승정원일기』는 다른 관청의 일기에 비해서 가장 많이 활용되었는데,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등장하는 상당수 일기는 대개 『승정원일기』를 지칭할 정도이다. 한편 국가 기관에서 편찬한 것 중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는 일기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는 하나 그 체제와 내용이 『조선왕조실록』과 동일하다.

이 밖에 관찬으로 특정 사건에 대한 기록이 일기 형식으로 편찬되었다. 1464년(세조 10)에는 계유정난(癸酉靖難: 한자 삭제)을 정리한 『정난일기(靖難日記)』(『세조실록』 10년 10월 14일), 1479년(성종 10)에는 여진 정벌 관련 기록인 『서정일기(西征日記)』(『중종실록』 38년 1월 6일), 1728년(영조 4)에 있었던 무신란(戊申亂) 즉 이인좌의 난 진압 후 그 과정을 정리한 『감란록(勘亂錄)』(『영조실록』 5년 11월 12일) 등이 그것이다.

사회단체에서 작성한 일기는 서원이나 향교 등에서 작성하거나 소청(疏廳) 등에서 작성한 일기가 있다. 서원이나 향교의 건립 과정을 소개하거나 이들 기관에서 행해지는 제향이나 봉안 행사 등이 기록되었다. 소청에서 작성한 일기는 상소문을 올리는 구체적인 과정을 기록하였다.

현전하는 일기의 대부분은 개인이 작성한 것이다. 이를 다시 내용을 기준으로 보면 생활일기가 대부분이다. 이 밖에도 사환일기, 사행일기, 전란일기 등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여행의 여정과 감흥 등을 기록한 일기도 다수 전한다. 생활일기는 향촌에 거주하는 인물이 생활과 경험, 견문 등을 기록한 것으로, 날씨나 자연재해를 기록한 것 이외에도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진 상례·제례·관례·혼례, 또는 인적 교류와 경제 활동과 관련되어 장시(場市) 출입 기록이나 농업 경영, 노비 매매, 토지 매매, 물가 등도 기록하였다. 생활일기에는 이 밖에도 향회(鄕會)의 운영이나 수령 또는 이서배(吏胥輩)의 동향을 기록한 경우도 있다. 생활일기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김령(金坽)의 『계암일록(溪巖日錄)』과 구상덕(具尙德)의 『승총명록(勝聰明錄)』 등이 있다.

사환일기는 개인이 관직 생활 중에 있었던 경험이나 일상 등을 기록한 경우였다. 관직 생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며, 지방관인 경우에는 수령의 지방 통치 실상을 전해 준다. 사환일기에는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를 비롯해 황사우(黃士祐)의 『재영남일기(在嶺南日記)』, 서유구(徐有榘)가 수원유수로 재직하면서 작성한 『화영일록(華營日錄)』, 김익(金熤)이 작성한 『죽하일기(竹下日記)』 등이 있다.

사행일기는 사신이나 사신의 수행원이 사행의 여정에 따라 변화하는 풍물에 대한 견문과 도중에 만난 인물들과의 시문 교류 등을 기록한 것이다. 방문국에 따라 명칭이 다르게 전한다. 명나라 사행 기록은 『조천록(朝天錄)』 또는 『조천일기(朝天日記)』, 청나라 사행 기록은 『연행록(燕行錄)』 또는 『연행일기』, 일본통신사 기록은 『동사록(東槎錄)』 또는 『해사록(海槎錄)』 등으로 기록되었다.

전란일기는 전쟁의 지휘관이나 개인이 전란 중에 겪은 경험이나 피난 생활 등을 기록한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직접 전투에 참여한 장수의 일기로 당시의 전쟁 상황이나 군사 동향 등을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 오희문(吳希文)의 『쇄미록(瑣尾錄)』은 피난 생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 밖에도 『정유피란기(丁酉避亂記)』는 정호인(鄭好仁)이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가 귀국하여 작성한 것이다.

한편 개인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이를 상소에 첨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1529년(중종 24) 충청도 연기의 유생 이종백(李宗白)이 상소를 올리면서 「문견일기(聞見日記)」를 첨부하였는데, 내용은 병영에서 잡물을 함부로 징수하는 것과 공주나 청주의 수령들이 폐단을 일으킨 일 등이었다. 이는 격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백성의 폐단을 말했다고 하여 이를 바탕으로 조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중종실록』 24년 12월 17일).

변천

일기는 인간의 문자 생활과 더불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론되며, 역사상 사관이 설치되고, 이들에 의해서 편년 기록이 이루어지면서 본격화되었다. 중국에서는 주나라 때부터 사관이 설치된 사실로 보아 그 기원은 상당히 오래전으로 소급된다. 우리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일기가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 사관 설치가 공식화된 광종조 이후부터 일기 작성이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궐내에서 일어난 왕의 행적을 주로 기록한 『자문일기(紫門日記)』와 같은 일기가 기록상으로 확인된다. 현전하는 일기로 가장 오래된 것은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수록된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인데, 과거에 전주목 일대를 유람하며 짤막하게 기록해 둔 초록을 몇 년 뒤에 문장체로 수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 승려 무외(無畏)의 『암거일월기(庵居日月記)』가 전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일기의 작성이 활발해졌다. 조선시대 일기는 초기에는 주로 국가 기관이나 관료들을 중심으로 작성되다가 16세기 이후에는 재야 사림들이 많은 일기를 남겼다. 16세기 이후 독서인층의 확대가 주요한 이유였다. 16세기에 작성된 일기로는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 이순신의 『난중일기』, 오희문의 『쇄미록』 등이 대표적이다. 이어 17세기 이후에는 점차 일기의 대상 내용이 확대되면서 사행일기나 전란일기 등이 다수 작성되었다. 최기(崔沂)의 『조천일기』를 비롯해 오윤겸(吳允謙)의 『동사상일록(東槎上日錄)』, 석지형(石之珩)의 『남한일기(南漢日記)』 등이 이에 해당한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는 기록을 상세히 남기려는 경향이 더욱 현저해지면서 많은 일기가 작성되었다. 근대 이후에도 많은 일기가 작성되었는데, 대표적으로 김윤식(金允植)과 윤치호(尹致昊)의 일기 등이 있다. 구례의 오미동에서 대대로 살았던 문화유씨가에서 작성한 일기인 『시언(是言)』과 『기어(紀語)』를 통해서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위기의식이나 시대의 변화상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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