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趙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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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7년(태종 17)~1475년(성종 6) = 59세]. 조선 전기 세종(世宗)~성종(成宗) 때의 문신. 예조 참판(參判),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자는 치규(穉圭)이다. 본관은 양주(楊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중추원(中樞院) 영사(領事)조말생(趙末生)이고,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가선대부(嘉善大夫)검한성부윤(檢漢城府尹)신하(申夏)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중추원 판사(判事)조의(趙誼)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증 정헌대부(正憲大夫) 호조 판서(判書)조인필(趙仁弼)이다. 문장에 뛰어나 의례나 외교에 쓰이는 문서를 다수 작성하였고, 지방관으로 부임했을 때에도 선정(善政)으로 이름이 높았다.

세종~성종 시대 활동

1441년(세종 23) 식년시 정과에 급제했다.[『방목(榜目)』] 앞서 1438년(세종 20) 아버지 조말생이 옛적에 뇌물 수수의 구설수에 올랐다는 이유로 조근이 문과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했는데도 녹명(錄命)을 하지 않아 하루 종일 서서 기다렸고 이틀 뒤에야 이름을 기록하는 일이 발생하여, 조말생이 직접 세종에게 탄원한 일이 있었다.(『세종실록』 20년 3월 5일) 1444년 집현전(集賢殿)부수찬(副修撰)으로서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최만리(崔萬理) 등과 함께 한글 제작에 반대하다가 의금부에 하루 동안 하옥되기도 했다.(『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문종(文宗) 때에는 겸(兼) 승문원(承文院) 부교리(副校理)로서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파견되는 좌의정(左議政)황보 인(皇甫仁)의 종사관(從事官) 역할을 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전지 15결을 하사 받았다.(『문종실록』 즉위년 8월 15일),(『문종실록』 1년 1월 24일) 단종(端宗) 때에는 이조 정랑(正郞)을 역임하다가 상피(相避)하는 법을 어겨 탄핵을 받았으나 직접 처벌은 받지 않았다.(『단종실록』 1년 6월 21일),(『단종실록』 1년 9월 29일)

세조(世祖)> 때에는 2등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이후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 종부시(宗簿寺)판사(判事), 중추원 첨지사(僉知事), 예조 참의(參議), 예조 참판을 지냈다.(『세조실록』 2년 7월 25일),(『세조실록』 3년 8월 14일),(『세조실록』 7년 11월 5일),(『세조실록』 10년 5월 1일),(『세조실록』 11년 4월 4일) 1462년(세조 8)에는 노비 문서를 위조했다 하여 고신(告身)을 빼앗기고 외방에 부처(付處)되었다가, 4개월 뒤에 고신을 돌려받았다.(『세조실록』 8년 2월 30일),(『세조실록』 8년 6월 27일) 1466년(세조 12)과 1467년(세조 13)에는 정조사(正朝使) 및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고,(『세조실록』 12년 10월 8일),(『세조실록』 13년 3월 10일) 이후에도 수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세조실록』 13년 12월 22일),(『세조실록』 14년 2월 24일) 예종(睿宗) 때에는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성종 때까지 재임했다.(『예종실록』 즉위년 10월 30일),(『성종실록』 1년 2월 17일) 1471년(성종 2)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임명되었다.(『성종실록』 2년 2월 1일) 1475년(성종 6) 59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성종실록』 6년 1월 16일)

성품과 일화

조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렸을 때부터 명랑하며 영리하고 민첩하였고 성숙했다. 소년기에 이미 학문에 두각을 드러내 경사(經史)에 통달했다. 효성도 지극하여 모친상을 당했을 때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였으며, 아버지가 병에 걸렸을 때에는 정성을 다해 시종을 들었다. 성품이 단정하고 바르며 넓어 많은 친구들과 속내를 터고 지냈다 한다. 문장에 뛰어나고 해서(楷書)를 잘 써서 외교문서와 내외의 전례(典禮)에 사용하는 문서를 많이 작성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삼탄집(三灘集)』] 그 때문에 할아버지 조말생의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적손(嫡孫)이었던 조영(趙渶)이 낙상(落傷)을 당하여 어리석고 거동이 불편하다하여 조근으로 하여금 대를 이어 봉사(奉祀)하게 하였다. 적손도 아니고 차손(次孫)도 아닌 이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하여 세조가 의정부(議政府)와 예조에 명하여 이를 논하게 하였는데, 결국 조근이 제사를 주관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세조실록』 4년 8월 26일)

지방관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푼 일화도 전한다. 전주부윤으로 임명되었을 때에 관리와 백성이 모두 그 교화에 좇았다. 판관(判官)김신(金信)과 더불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부의 관(館)은 대청(大廳) 중앙에 있고 좌우에 익실(翼室)이 있는데, 동편은 높고 서쪽은 낮으며 동편은 넓고 서쪽은 좁은데, 다행히 창리고(創吏庫)에 남은 재물이 있어 서헌(西軒)을 고쳐 동헌(東軒)과 같이 하고자 하는데,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하니, 이민(吏民)들이 모두 이에 찬동하였다. 이에 일 없이 노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다른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나 건물이 새로워지니, 백성들이 감탄을 하면서 바라보았는데, 건물이 고쳐진 것만 볼 뿐이요, 공역(工役)이 어떻게 해서 되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했을 때에도, 재해로 흉년을 맞게 되자 공물 바치는 것을 정지하거나 군인으로 편성된 장정을 집으로 돌려보낼 것 등 백성을 구황(救荒)할 절목을 조목으로 자세히 작성하여 임금에게 건의하기도 했다.(『성종실록』 1년 2월 17일)

후손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중추원 부사(副使)이사원(李師元)의 딸인데,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1남 조영휘(趙永輝)는 수안군수(遂安郡守)임근(任瑾)의 딸과 결혼하였고, 사헌부 감찰(監察)에 올랐다. 2남 진사(進士)조중휘(趙仲輝)는 인수부(仁壽府) 윤(尹)강희안(姜希顔)의 딸과 결혼하였다. 1녀는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이세좌(李世佐)에게 시집갔고, 2녀는 학생(學生) 송자강(宋自剛)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삼탄집』(三灘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