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구서(典廐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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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부터 조선초까지 제사에 희생 제물로 사용할 가축을 기르는 일을 담당하던 관서.

개설

전구서는 여러 가축을 기르는 일을 담당하기 위하여 고려 목종 때 처음 설치되었다. 고려 문종대에 관직을 갖추었으며, 조선이 건국한 직후에도 그대로 존치되었다. 1407년(태종 7)에 종7품 아문에서 6품 아문으로 승격되었으며, 1460년(세조 6)에 전생서(典牲署)로 개칭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 목종 때에 처음 설치되어 여러 가축을 기르는 일을 담당하였는데, 문종대에 이르러 영(令)과 승(丞)의 관직을 갖추었다. 1392년(태조 1) 조선이 건국한 직후에 정한 관제에서도 전구서는 그대로 존치되어 국가의 각종 제사에 쓰일 희생물을 기르는 일을 담당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조직 및 역할

태조가 처음 전구서를 설치했을 때에는 종7품의 영 1명, 종8품의 승 2명과 사리(司吏) 2명을 두었다. 이들은 거위·오리·양·돼지 등의 희생물을 기르면서 민간에서 사료용 곡식과 개초(蓋草)를 거두기도 하였다.

변천

1407년(태종 7) 종7품 아문이던 전구서를 6품 아문으로 승격하였고, 1411년에는 가축의 번식을 위해 별감(別監)을 차정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조(提調)·제거(提擧)·별좌(別坐)·주부(注簿) 등의 직이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1414년 주부를 9품으로 내려 부승(副丞)이라 칭하였다. 1423년(세종 5)에는 제조 2명 가운데 1명을, 별좌 3명 가운데 1명을 줄이기도 하였다. 세조대에 이르러 전구서의 임무가 중하다고 하여 영·승·부승 각 1명을 모두 구임(久任)시키고, 예조(禮曹)의 전향사(典享司)정랑(正郞)을 서령(署令)으로 겸차(兼差)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4년 1월 27일). 이어 1460년(세조 6)에 관서의 이름과 직무를 일치시키기 위해 전생서로 개칭하였다(『세조실록』 6년 5월 26일). 이 전생서가 1466년 『경국대전』 편찬과 관련된 관제 정비 때 영이 주부로 개칭되고 종9품 참봉(參奉)이 설치되고 그 뒤에 다시 제조가 설치되면서 『경국대전』에는 제조 1직, 주부 1직, 직장(直長) 1직, 참봉 2직으로 규정되었고, 다시 『대전회통』에 종5품 판관(判官) 1직이 설치됨에 따라 종5품 아문으로 승격되면서 조선말까지 계승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최정환, 『역주 『고려사』 백관지』, 경인문화사, 2006.
  •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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