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곡(剩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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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곡이나 대여곡 등을 징수할 때, 보관상의 손실을 이유로 조금 더 징수하는 곡식.

개설

현물경제 하에서 곡식의 징수와 보관 과정에는 불가피하게 소모되는 부분이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곡식을 징수할 때에는 그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일정량의 부가 징수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15세기 후반 성종대에 편찬된 『대전속록(大典續錄)』에는 ‘관에서 곡물을 거둘 때 석(石)마다 그 나머지가 4되 이하면 논하지 않는다.’ 하여 1석당 4승 이하의 부가 징수를 허용하고 있었다. 16세기 중종대에도 지방에서 공채(公債)를 납부할 때 1석에 3승 혹은 3~4승을 더 거두어들였다. 조선전기의 환곡은 의창에서 무이자로 대여하였지만 세종대에는 1석당 3승을 부가 징수한 사례가 있었다(『세종실록』 5년 9월 16일). 이때에도 ‘이자’의 개념이 아닌, 보관 과정에서 자연감소분을 보충하기 위한 ‘모곡(耗穀)’이란 개념을 사용하였다. 16세기 이후 환곡에서도 1할을 부가 징수하면서 이자라는 용어보다 ‘모곡’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이는 사실상 이자의 의미가 강하였다.

내용 및 특징

지방관에게는 곡물을 징수할 때 약간의 곡식을 부가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나 규정 이외에 지나치게 많이 징수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부가 징수한 곡식은 지방관이 개인적으로 사용하거나, 흉년이 들었을 때 진휼 재원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지방관의 자의적인 잉곡 사용을 규제하려고 하였으나 지방 재정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지방관의 잉곡 사용을 엄격히 금지시킬 수는 없었다.

곡물을 취급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잉곡은 징수할 때의 부가 징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보관 중인 곡물이 창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소곡(掃穀)·소고곡(掃庫穀), 마질을 하고 남은 관여곡(官餘穀), 창고 조사 후에 남은 곡식인 번여곡(反餘穀) 등이 있었다. 중앙에 상납하는 전세(田稅)대동미(大同米)와는 달리 환곡은 각 고을에서 장기간 비축하는 곡물이었다. 지방관은 환곡의 운영을 통하여 적으면 수백 석에서 많으면 1,000여 석에 달하는 각종의 잉곡을 확보하고 있었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런 잉곡이 지방관의 개인 착복으로 귀결된다는 입장이었으나, 지방관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환곡 이자를 중앙 재정에서 가져가고 그에 더하여 대동법·균역법의 시행을 통하여 지방관 수입의 일부까지 중앙 재정으로 전용(轉用)하는 현실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대응이었다(『영조실록』 40년 2월 27일).

변천

환곡은 17세기 후반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18세기 후반에는 거의 10,000,000석에 육박할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16세기 이후 환곡에서는 1할의 부가 징수가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이를 지방관이 사용하였지만 후에 그 일부를 국가 중앙 재정에서 사용하는 ‘취모보용(取耗補用)’이 이루어지면서 지방 재정의 부족을 초래하였다. 환곡의 법적 이자는 1할이지만 환곡의 수납을 담당하는 지방관은 법적 이자 1할 이외에 추가 징수를 통하여 지방 재정을 확보하려 하였다.

18세기 후반 평안도 지역에서는 가을에 환곡을 징수할 때 잉곡이란 명목으로 징수를 담당한 감색(監色)에게 억지로 더 많은 양을 징수하였다. 그러자 갚을 방법이 없던 감색은 그만큼 민간에 더 징수하였는데 그 액수가 매우 많아서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조세열, 「16세기 환자제 운영의 추이」, 『역사연구』 6,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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