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미(大同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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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시행 이후 토산 현물 대신 토지에 부과된 세곡(稅穀).

개설

조선전기 공납제(貢納制)는 공안(貢案) 장부에 따라 각 군현에 분정(分定)된 토산 현물을 수령의 책임하에 중앙의 각 관서에 상납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16세기 들어 이러한 현물 공납제는 높은 값을 주고 방납(防納)하는 무리들과 이유 없이 물품에 퇴짜를 놓는 중간 관리층의 폐단으로 인해 변통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대동법은 현물 공납을 토지세로 전환한 조치로 광해군 즉위년에 경기선혜법을 시작으로 1708년(숙종 34) 해서상정법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에 걸쳐 6도에 확대 시행되었다. 대동법의 시행을 계기로 토지의 다과에 따라 결당 평균 12두의 대동세가 수취되어 선혜청 창고와 지방 관아의 재원으로 활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현존하는 호서, 호남, 영남 지역의 『대동사목(大同事目)』을 살펴보면, 각 도의 토지 결수와 결당 과세율을 밝힌 후에 중앙에 상납할 대동세의 양과 지방에 유치할 분량을 나누어 산출해놓았다. 경기와 강원 지역은 대동법 시행 초기 결당 16두(斗)를, 충청도는 10두, 전라도와 경상도는 13두를 거두는 원칙이 적용되었다. 황해도의 경우 상정미(詳定米) 12두에 별수미(別收米) 3두를 더하여 총 15두를 거두도록 하였다. 도마다 과세율을 다르게 적용한 근본적인 이유는 앞으로 더 천착해야 할 부분이지만 현재로서는 중앙 각 사의 공물 수요와 지방재정 경비를 감안하여 과세율을 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대동미 수취 방식은 현종대 이후 12두로 점차 평준화되어갔다.

변천

대동세는 『대동사목』이 작성될 당시에는 쌀로만 계산되었지만, 대동법이 확대 시행되는 과정에서 육로에 위치한 고을의 경우 포목과 동전으로 바꾸어 내도록 하였다. 숙종대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고 각 읍에서 포나 동전으로 대신 납부하기를 청하는 소가 올라옴에 따라 중앙정부는 내륙 산간에 위치한 고을에 대해서는 수송의 불편을 고려하여 포납(布納), 동전납(銅錢納)을 허용해준 것이다. 이처럼 중앙의 선혜청 창고와 지방관아에 쌀·포목 같은 현물화폐와 동전 같은 금속화폐가 함께 납입되면서 현물 중심으로 운영되던 그간의 재정운영에 변화가 야기되었다.

참고문헌

  •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
  •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
  • 『영남대동사목(嶺南大同事目)』
  • 이정철, 『조선 최고의 개혁 :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 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한영국, 「대동법의 실시」, 『한국사』13, 국사편찬위원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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