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납(防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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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준비할 수 있는 공물도 방납 모리배가 강제로 대납(代納)하고 보상받는 행위.

개설

방납은 백성이 준비할 수 없는 공물을 대신 바친 후에 그 값을 보상받는 대납(代納)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백성이 준비할 수 있는 물건까지도 방납 모리배가 강제로 대납한 후에 그 값을 보상받는 행위를 의미하였다.

공물 대납의 허용은 이미 『속육전』 단계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는 백성이 준비할 수 없는 공물에 한해 일부 특수 기관 혹은 불사(佛事)와 관계된 간사승(幹事僧)에게 부분적으로 대납을 허용하였다.

공물 대납에서 하나의 큰 전기가 마련된 것은 세조대부터였다. 1461년(세조 7) 정월, 공물 대납은 공물 부담자와 대납인과의 동의가 있을 경우에만 허용되었다(『세조실록』 7년 1월 3일). 대납 금액은 수령이 중간에서 조정하여 민가에서 값을 받아 대납자에게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백성이 희망하지 않는데도 강제로 대납하는 방납 행위, 대납 금액을 정가(定價) 이상으로 징수하는 행위, 청부인이 관에 신고하지 않고 제멋대로 직접 민가에서 대가를 징수하는 행위는 금지하였다. 그러나 세조대에 허용하였던 대납은 예종이 즉위하면서 반포한 교유(敎諭)에 따라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그 후 『경국대전』에 “공물을 대납한 자는 장(杖) 80대, 도(徒) 2년에, 영구히 서용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으로 법제화되었다.

연원 및 변천

각 군현마다 분정된 공물은 임토작공(任土作貢)의 이념에 따라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을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 가운데는 토산물뿐만 아니라 그 군현에서 나지 않는 불산물(不産物)도 속해 있었다. 한편 공물로 제정될 당시에는 생산되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것도 적지 않았다. 또한 활[角弓]·배[船隻]와 같은 공물은 민가에서 쉽사리 준비해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활 하나를 만드는 데는 3~4마리 소와 말의 힘줄[筋]이 필요하였고,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선재(船材)와 공역(功役) 및 기술이 필요하였다. 이 때문에 민가의 대부분은 쌀이나 포[米布]를 거두어 무역하여 상납하였다.

각 군현의 수령은 공안(貢案)에 의거하여 당해 군현에 부과된 공물을 마련하였고 공리(貢吏)는 이것을 납부하였다. 공리가 각사에 공물을 상납할 때에는 당해 군현의 수령이 발급한 공물 명세서인 진성(陳省)을 첨부해야만 하였다. 진성은 전적으로 수령의 관장 하에 발급하였기 때문에 이를 얻으려면 수령과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였다.

간사승은 최초로 합법적인 방납 활동을 허용받았다. 이들은 왕실·종실의 비호 아래 방납을 행하였기 때문에 진성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였다.

공물은 각 군현 단위로 분정되었기 때문에 왕실·중앙의 각사에 대한 수송과 상납의 책임은 수령에게 있었다. 특히 공물의 납(納)·미납(未納)은 수령의 해유(解由)에도 매우 중요한 조건이었다. 한 군현의 수령이 중앙의 6사(司) 이상에 미납할 경우 파출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공물 상납의 책임을 맡았던 수령은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서 부상대고와 결탁하여 방납하기도 하였다.

권세가들은 수령보다 상위의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권세를 이용하여 수령에게 강제로 요청하여 진성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권세가들은 직접 방납에 개입하기도 했지만, 부상대고와 결탁하여 방납하기도 하였다.

부상대고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수령·각사이노(吏奴)에게 방납에 필요한 자금을 융통해 주거나, 지방관을 움직일 수 있는 권세가·승려 등과 결탁하여 방납에 종사하였다. 세조대에 이르러 대납이 공인됨에 따라 부상대고의 활동은 현저하게 나타났다. 양성지는 국가 재정에서 공물이 전체의 6/10을 차지하는데, 공물 상납은 거의 대납에 의한 것이며 그 대납의 대부분이 부상대고에 의해 납입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였다.

원래 대납 허용의 취지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돕게[有無相資]’하여 공사(公私)에 적절하고 편리하게 하는 데 있었다(『세조실록』 14년 6월 18일). 그런데 수령이 권세가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백성들이 쉽게 준비할 수 있는 물품까지도 강제로 문권(文券)을 만들어 권세가와 결탁한 부상대고에게 대납을 허용하였다. 그러면 부상대고는 관의 세력을 빙자해 마을을 횡행하면서 직접 대납 금액을 징수하여 그 폐해가 막심하였다.

각사의 이노는 공물 수납을 담당하였던 실무자라는 점에서 방납 활동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1469년(예종 1) 6월 공조판서양성지는 이들이 그 실무를 빙자하여, 생초(生草)를 거두어들일 때에는 푸른 풀을 시들었다 하여 물리치고, 돼지 를 거두어들일 때에는 살찐 돼지를 수척하다 하여 물리친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남문으로 물리쳤던 생초를 서문으로 받아들이고, 집에서 기르던 돼지는 대납하며 또 물리쳤던 돼지는 자기 집에서 길러 나중에 대납할 준비를 하였다. 또한 이들은 공리가 바치는 공물이 아무리 품질이 좋다고 하더라도 온갖 꾀로 물리치고 방납을 자행하였다. 각사에 공물을 상납하지 못한 공리는 견책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각사이노에게 많은 월리(月利)를 지급하고 요구를 들어 주고서야 공물을 겨우 바칠 수 있었다(『예종실록』 1년 6월 29일).

각사이노의 활동을 문제 삼아 이에 대한 처분을 제정한 것은 1524년(중종 19)에 와서였다. 이해 여름 평안도에서 전염병이 유행하여 많은 백성이 사망하였다. 이 때문에 변방에 죄인을 들여보내 부족한 인구를 채우려는 전가사변죄(全家徙邊罪) 12조를 제정하였다. 방납 행위도 그중 한 항목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금지 규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방납 활동은 더욱 확대되어 명종대에 이르면 각 고을에서 정공(正供)하는 물건은 모두 그들의 수중에 있다고 할 정도였다.

사주인(私主人)은 공리와 결탁하여 방납 활동을 하였다. 사주인과 공리의 결탁은 세조대 이전에 이미 나타나지만, 1471년(성종 2)에 이르러서는 정치적으로 중대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그 결과 사주인과 공리 등에 대한 단속·감독의 강화와 함께 처분·제재 방안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성종실록』 2년 5월 25일).

방납은 16세기에 들어와 지주층이 대토지를 소유하는 일이 성행하면서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토지 지배 관계의 기본적인 경향은 수조권적 지배에서 소유권적 지배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는 바로 지주제 확대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16세기에 일어난 새로운 경제 변동 아래에서 이익을 누린 층은 척신을 중심으로 한 권세가 및 궁가에 치우쳐 있었다. 척신을 비롯한 권세가들은 권력이 강대한 만큼 그것을 이용한 경제적 사익 추구도 활발하였다. 이들은 시전상인들을 통하여 교역품을 처분하기도 하였고, 또한 그들이 획득한 부를 상업자본으로 전환하여 해외무역에 투자하기도 하였다. 특히 방납은 그들의 대표적인 경제활동의 하나였다. 당대의 실권자인 권세가들은 모리 수단으로 수령들에게 직·간접으로 방납을 강요하여 방납 활동의 주체자 혹은 배후자로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대개가 시전상인과 연결하여 방납에서 이득을 얻고 그 이권을 뒷받침해 주는 관계를 가졌다. 당시에는 이것이 하나의 추세였다. 방납의 대상 물품도 각사의 공물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왕에게 바치는 어공(御供)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들은 방납을 통해 몇 배 이상의 이익을 얻었고, 농민은 파산하여 떠도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이 방납은 심한 수탈을 수반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국가에서 법으로 금하는 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회 있을 때마다 거듭 단속하였다. 방납인을 처벌하는 법으로는 북방으로 전 가족을 보내는 전가입거(全家入居)나 사형 등의 강력한 형벌이 있었다. 그러나 방납은 근절되기는커녕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방납이 국가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점차 더 확산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시기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이에 따른 사회적분화라는 현실적인 측면이 작용하였다. 당시에는 해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상경연작(常耕連作)이 가능해졌다. 연해지·저습지를 개간하고 수리시설을 확충하여 수전 농업이 확대되었고 목면 재배도 성행하였다. 이와 같은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농가 소득을 늘리고 이에 따른 잉여를 창출하여 농민의 유통경제가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한편 농민의 입장에서도 공물 조달이 농사에 커다란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자구책으로 가장 쉽게 채택할 수 있는 것이 대납이었다. 특히 왕실·정부의 필요에 따라 상납해야 하는 별공(別貢)·불시진상(不時進上) 등의 물품은 납부 기한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이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대납이 불가피하였다.

공납에서의 대납·방납의 보편화는 당시 성장하던 유통경제와 농민의 경제활동을 결합시키는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유통경제의 대표적인 매개물로는 쌀과 포를 들 수 있는데, 공물의 대가로서 쌀·포를 거두는 형태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쌀·포가 농민 사이에서 교역의 매개물로 사용된 것은, 이것들이 농민 생활의 필수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지배층의 주된 수탈 대상물로 누구에게나 가치 있었기 때문이다. 면화 재배가 널리 보급되면서 면포는 농민들의 의생활의 변화를 가져왔다. 면포는 민간 사이의 거래나 부세 납부에서 마포(麻布)를 밀어내고 정포(正布) 혹은 상포(常布)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방납의 매개물은 16세기 초까지 면포가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쌀과 포가 병용되다가 지역적 편의에 따라 산지[山郡]는 포(布), 바닷가[海邑]는 쌀로 고정되어 갔다.

결국 국가에서도 당시 발전하는 경제 체계 속에서 점차 비중이 커져 가고 있던 방납 행위를 원칙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비리를 제거하고 상품유통 경제와 수공업의 발달 흐름을 바람직한 방향에서 수용하여, 물품[本色] 대신 교환수단인 쌀·포로 수취하는 합리적인 운영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는 물품보다 쌀·포로 바치는 것이 농민에게 편하고 이로운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즉, 농민은 농사만 짓고 공물은 그것을 생산하는 자에게 맡기는 것이 국가 재정상으로나 혹은 농민 경제 측면에서 바람직하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각 군현의 전결 수를 헤아려 공물의 종류·물량을 분정하고 가격을 결정하였다. 이를 사대동(私大同)·대동제역(大同除役)이라 하였다. 이는 당시의 수취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 공물 금액 징수의 확대·정착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율곡 이이는 해주 지역에서 행해지던 전지 1결마다 미 1두를 거두는 수미법(收米法)을 전국에 시행한다면 방납의 폐단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이는 농민에게는 물품보다 쌀을 바치는 것이 편하고 이롭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내용

방납은 백성이 준비할 수 있는 물건까지도 방납 모리배가 강제로 대납한 후에 그 값을 보상받는 행위를 의미하였다. 방납 모리배들은 정치권력을 매개로 교역에 기생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특히 흉년으로 인해 물가가 상승했을 때에는 그 틈을 타서 더욱 많은 이익을 얻었다. 방납이 그들에게는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주었지만, 이를 담당하는 농민에게는 가혹한 수탈 행위로 작용하여 파산·유망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선전기 위정자들은 일찍이 공물 방납이야말로 민생에 폐해를 끼치는 모리 행위일 뿐만 아니라 왕조의 현물 재정 체제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이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발전하는 경제 체계 속에서 방납은 점차 비중을 높여가고 있었다. 결국 국가는 방납 행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수용함으로써 본색공물(本色貢物) 대신 교환 수단인 쌀과 포로 수납하는 대동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대동법은 생산물의 현물 징수가 미·포·전을 매개로 전세화되는 부세 형태로의 변화뿐만 아니라 이전의 본색공물 대신 관용 물자를 시장 구조를 통해 구매·사용하는 체제로의 전환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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