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모보용(取耗補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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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곡을 거두어들일 때 이자를 받아서 국가 재정에 보충하는 것.

개설

조선초기에 환곡은 이자 없이 원곡(元穀)만을 받아들였으나 16세기에 들어서는 원곡의 10%를 추가로 징수하였다. 본래 모곡은 보관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 감소분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사실상 이자와 다를 바 없었다. 환곡에서 10%를 부가 징수한 몫은 처음에는 지방관이 사용하였다. 이후 모곡을 중앙 재원으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계속되면서, 환곡 이자의 일부를 국가 재정에 충당하게 되었다. 그 비율도 1할·3할·8할 등으로 점차 높아졌다. 지방관이 사용하던 환곡 이자를 국가 재원으로 활용함에 따라 지방관은 지방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환곡의 법정 이자 이외에 각종 명목을 붙여 환곡에서 추가 징수를 하게 되었다. 환곡 운영상의 각종 폐단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초기의 환곡 운영에서는 이자가 없었다. 곡식을 보관할 때 자연 감소분이 발생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15세기 세종대에 1석당 3되의 곡식을 부가 징수한 사례가 있으나 곧 폐지되었다(『세종실록』 5년 9월 16일).

16세기에는 환곡의 출납을 담당하는 지방관이 임의로 부가 징수를 하였으며 이후 정부에 의하여 1/10 이자가 공인되었다. 다만 그 정확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았다. 환곡에서의 부가 징수는 지방 재정의 주요 재원으로 활용되었다. 그런데 국가 재정이 부족해지자 정부에서는 환곡의 부가 징수를 국가 재정에 활용하려는 시도를 지속하였다. 16세기 후반부터 환곡 이자에서 1할·3할·8할 등 국가 재정에 충당하는 비율이 높아졌으며 이자 전부를 국가 재정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내용

16세기 명종대에 이르러 환곡 이자를 국가 재정에 활용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환곡 이자를 국가 재정에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다만 1642년(인조 20)에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환곡 이자의 1할을 국가 재정으로 활용한 사례가 있고, 1637년(인조 15)에 환곡 이자의 3할을 국가 경비에 보충한 사례가 있었다.

환곡 이자를 국가 재정에 활용한 가장 중요한 시점은 1650년(효종 1)에 호조(戶曹) 환곡의 이자 3/10을 상평청에 이관한 때였다. 환곡 모곡의 30%를 국가의 회계 장부에 기록한다는 의미인 ‘삼분모회록(三分耗會錄)’이 상평청에 시행됨으로써 상평청은 호조 이외에 독자적인 환곡 운영기관이 되었다. 1650년에 호조 환곡의 이자 30%가(를) 상평청에 이관된 이유는 당시 빈번히 왕래하던 청나라 사신을 상평청에서 접대하기 위해서였다.

1650년 이후 호조 환곡 이자의 상평청 이관은 지속되었다. 상평청에 이관된 환곡의 이자는 일시적으로 다른 기관의 비용으로도 사용되었지만 계속해서 비축되었고, 또한 상평청 환곡으로 운영되었다. 즉, 상평청에서는 호조 환곡의 이자 30%를 이관받아서 그 곡식을 원곡(元穀)으로 삼아 환곡을 운영하였던 것이다. 이는 17세기 후반 조선왕조의 재정 악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국가는 재정 부족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비축 곡물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후 호조 환곡이 3,000석 이하일 때에는 호조의 장부에만 기록하며, 3,000~5,000 석일 때에는 석당 3되 5홉을, 6,000~9,000석일 때에는 6되, 10,000석 이상일 때에는 8되 5홉을 상평청에 이관하도록 규정하였다. 즉, 일률적으로 4되 5홉(30%)의 이자를 이관하는 규정보다 그 비율이 증가하고 있었다.

상평청 환곡도 1/10의 이자를 징수하였고, 그 이자의 8할을 원곡에 보충하는 운영을 하였다. 이처럼 상평청은 호조 환곡의 이자 3할을 이관받고, 또 독자적인 환곡을 운영하여 그 이자의 8할을 원곡에 비축하였다. 이 때문에 상평청의 환곡은 단시간 내에 급격히 증가하였고 18세기에 들어서는 호조 환곡의 총량을 초과하여, 상평청이 환곡을 관리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부각하였다.

또한 흉년이 들었을 때에만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되었던 진휼청도 17세기 후반 현종대에는 상설화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휼청도 독자적인 환곡을 마련하여 재정아문으로 등장하였다. 진휼청의 환곡도 상평청 환곡과 동일하게 그 이자의 8할을 원곡에 비축하였다.

변천

17세기 후반에 호조 환곡의 이자를 상평청에 이관하여 상평청 환곡을 만들고, 뒤이어 진휼청 환곡을 만든 이후 환곡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환곡은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지급되기도 하였다. 상평청 환곡과 진휼청 환곡의 이자에서 8할을 원곡에 비축하였기 때문에 지방관이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은 이자의 20%에 불과하였다. 호조 환곡에서는 7할가량을 지방관이 사용할 수 있었지만 상평청·진휼청 환곡에서는 단지 2할만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17세기 후반 상평청 환곡이 형성된 이후 공명첩(空名帖)을 활용한 첩가곡(帖價穀), 지방관이 마련한 곡물인 자비곡(自備穀) 등이 추가로 창설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는 다른 지역에 흉년이 들었을 때 이전해 줄 목적으로 나리포창(羅里舖倉)·포항창(浦項倉) 등의 각종 창고곡이 만들어졌다. 18세기 후반에는 균역청을 비롯한 중앙의 각 기관에서도 비용 조달을 목적으로 환곡을 창설하여 환곡의 액수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호조·상평청·진휼청 환곡을 제외한 다른 환곡들은 그 이자의 전액을 원곡에 비축하거나 곧바로 비용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지방관이 사용할 몫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18세기에 환곡이 급증하는 가운데 지방관은 환곡 출납 업무를 담당하면서도 환곡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이 오히려 감소하였다. 또한 호조·상평청·진휼청 환곡은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지급하였기 때문에 그 액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지방관은 환곡 운영을 통하여 지방 재정을 확보할 수 없게 되자 그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환곡에서 1할 이자 이외에 각종 명목을 달아 부가 징수를 하였다. 이렇듯 환곡 운영 과정에서 온갖 편법을 동원하여 재원을 확보하려 하였기에 환곡 운영에서는 각종 폐단이 발생하였다.

참고문헌

  •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 『곡총편고(穀總編攷)』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賑政)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송찬식, 「이조시대 환상취모보용고」, 『역사학보』 27, 1965.
  • 조세열, 「16세기 환자제 운영의 추이」, 『역사연구』 6, 1998.
  • 양진석, 「17, 18세기 환곡제도의 운영과 기능 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