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준(任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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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8년(선조 41)~1675년(숙종 1) = 68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이자 학자. 사재감(司宰監)첨정(僉正)과 영천군수(榮川郡守) 등을 지냈다. 자는 백심(伯深)이고, 호는 은돈(隱墩)이다. 본관은 풍천(豐川)이며, 거주지는 평산(平山)이다. 아버지는 학생(學生) 임경우(任慶祐)이고,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신정(申霆)의 딸이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33년(인조 11) 26세 때 진사시에 합격한 후, 몇 년 뒤에 순릉(順陵)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641년(인조 19) 예빈시(禮賓寺) 봉사(奉事)가 되었다가, 1651년(효종 2)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로 승진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9년 10월 10일, 효종 2년 12월 11일] 이어 다음해인 1652년(효종 3) 석성현감(石城縣監)으로 나갔으며, 1656년(효종 7)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사옹직장(司饔直長)이 되었다가 부여현감(扶餘縣監)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3년 12월 15일, 『승정원일기』효종 7년 8월 23일, 효종 7년 9월 15일, 효종 7년 12월 26일] 1658년(효종 9) 영접도감(迎接都監)낭청(郎廳)에 임명되었고, 1659년(효종 10) 호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승정원일기』효종 9년 12월 24일, 효종 10년 1월 13일]

현종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년) 대흥현감(大興縣監)으로 나갔는데, 이때 관찰사가 그 고을 안에다 묘소를 잡는 바람에 산간 백성 수십여 호가 다른 곳으로 쫓겨나야 되는 일이 있었다.[『승정원일기』현종 즉위년 7월 11일] 이에 임준은 관찰사의 명을 듣지 않고, “자신이 목민관(牧民官)이 되어 정말로 이러한 일은 차마 할 수 없다.”라며 끝내 변동하지 않으니 관찰사가 허락하였다.[『남계집(南溪集)』 권77 「영천군수 임공 묘지명(榮川郡守任公墓誌銘)」]

그 뒤에 1664년(현종 5) 의금부 도사를 거쳐 공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현종 5년 8월 2일, 현종 5년 12월 22일] 이듬해인 1665년(현종 6)에는 평시서(平市署)영(令)을 거쳐 사재감 첨정이 되었다.[『승정원일기』현종 6년 3월 10일, 현종 6년 12월 26일] 이어 1666년(현종 7)에는 영천군수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현종 7년 5월 27일]

한편 임준은 특히 산학(算學)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리하여 1662년(현종 3) 원(元)나라의 산학서인 『신편산학계몽(新編算學啓蒙)』을 해설한 『신편산학계몽주해(新編算學啓蒙註解)』를 엮었다. 아울러 임준은 구장산술(九章算術)을 잘하였다고도 알려져 있었는데, 참판(參判)김시진(金始振)이 산수에 관한 서적을 소장해 놓고 있다가 일부를 잃어버리자 임준에게 보완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 뒤에 다른 판본을 대조하니, 꼭 들어맞아 김시진이 탄복을 했다는 것이다.[『남계집』 권77 「영천군수 임공 묘지명」]

영천군수에서 물러난 뒤 임준은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 머물다가 1675년(숙종 1)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임준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돈독 확고하고 평온 조용하여 가정 내의 행실이 닦아져 깨끗하였으며, 벼슬살이 할 때 청렴 근신하고 강직 명확하였다고 한다. 또한 평생 동안 함부로 사람과 사귀지 않고 집 안에만 들어앉아 자취를 감추어 살면서 죽거리가 자주 떨어져도 태연히 자적(自適)하였으며, 문장을 저술할 때도 고고(高古)하고 침건(沈健)하여 세속의 진부한 말을 쓰지 않다가 결국 경술(經術)로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이로 말미암아 학사(學士) 대부(大夫)들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그의 어진 것을 알았고 향리의 인사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경복(敬服)한다고 한다.

한편 임준의 일화로는 영천군수로 있을 때의 일이 전한다. 토호이던 장씨(張氏)가 오래전에 어떤 사람과 송사를 벌였는데, 전 수령이 그의 세력이 두려워서 법을 왜곡하여 그가 승소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임준이 부임하여 재조사 후에 상급의 부서로 이첩시켰는데 관찰사가 임준의 판결을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공평과 명찰이 아니었다면 내가 동요될 뻔하였다.”라고 하였다고 전해진다.[『남계집』 권77 「영천군수 임공 묘지명」]

묘소와 후손

임준의 묘소는 금천(金川) 신화령(新化嶺)에 있다가 3년 뒤 황해도 평산(平山) 어은동(漁隱洞)으로 이장(移葬)하였다.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묘비명이 남아있다.[『남계집』 권77 「영천군수 임공 묘지명」]

부인 은풍 신씨(銀豐申氏)는 진사(進士)신택인(申擇仁)의 딸이다.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임원구(任元耉)는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올랐고, 맏딸은 서이관(徐以寬)에게, 둘째 딸은 허도(許翿)에게 각각 시집갔다.[『남계집』 권77 「영천군수 임공 묘지명」]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남계집(南溪集)』
  • 『두산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