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유근(尹惟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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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9년(선조 32)∼1660년(현종 1) = 62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효종(孝宗) 때의 문신. 형조 정랑(正郞)과 호조 정랑 등을 지냈다. 자는 이신(而愼)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정랑(正郞)윤홍의(尹弘毅)이고,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충의위(忠義衛)안상충(安尙忠)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참판(參判)윤인함(尹仁涵)이다. 좌랑윤홍립(尹弘立)의 조카이기도 하다. 정양(鄭瀁)과 박석(朴晳)과 절친한 사이였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27년(인조 5)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9세였다.[『방목(榜目)』]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으나, 대과(大科)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1635년(인조 13)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들이 율곡(栗谷)이이(李珥)와 우계(牛溪)성혼(成渾)을 퇴계(退溪)이황(李滉)처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3년 5월 11일] 윤유근(尹惟謹)이 소두(疏頭)가 되어 왕에게 상소하였으나, 인조가 받아들이지 않자, 많은 유생들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서 복합(伏閤)하였다.[『한수재집(寒水齋集)』 권26 「정랑윤공유근묘갈명(正郞尹公惟謹墓碣銘)」 이하 「윤유근묘갈명」으로 약칭] 이때부터 윤유근은 서인(西人)의 강경론자로 낙인이 찍혀, 동인(東人)의 배척과 남인(南人)의 공격을 받았다.

인조 때 음직(蔭職)으로 효릉참봉(孝陵參奉)과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 평시서(平市署)봉사(奉事)에 임명되었다가,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를 거쳐, 군자감(軍資監) 판관(判官)이 되었다.[「윤유근묘갈명」]

효종 때 6품의 호조 좌랑(左郞)을 거쳐 형조 좌랑(左郞)으로 승진하였는데, 1651년(효종 2) <김자점(金自點)의 옥(獄)>을 다스려 그의 죄를 밝혀냈다. 김자점은 효종이 장릉(長陵 : 인조 왕릉)의 지문(誌文)에 청(淸)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청나라에 밀고하고, 청나라 세력을 얻어서 인조와 조귀인(趙貴人)의 아들인 숭선군(崇善君)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하였다. 1652년(효종 3) 2월 효종이 김자점의 옥을 다스린 공으로 윤유근을 6품 관직으로 천전(遷轉)시키는데, 이미 6품이었으므로 5품 관직으로 승진시켰다. 이에 윤유근은 5품 형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효종실록』효종 3년 2월 2일, 「윤유근묘갈명」]

그 뒤에 외직으로 나가서 의성현감(義城縣監)이 되었는데, 1655년(효종 6) 2월 경상도의 암행어사(暗行御史)였던 이연년(李延年)이 “의성현감윤유근이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았다.”고 보고하였다. 그러자 남인 출신의 호조 판서(判書)허적(許積)이 그를 탄핵하였고, 이에 윤유근은 의성현감에서 파직되고 영평현(永平縣)으로 유배되었다.[「윤유근묘갈명」] 그 뒤에 호조 정랑에 임명되어 각 도의 양전(量田) 사업을 지휘하다가, 병으로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몇 년 동안 한가롭게 지내면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진선(進善)정양(鄭瀁) 및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 박석(朴晳)과 함께 산수가 좋은 명산(名山) 대천(大川)을 찾아다니면서 유람하였다. 1660년(현종 1) 10월 15일 병으로 서울의 본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2세였다.[「윤유근묘갈명」]

성품과 일화

윤유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천성이 청렴하고 강직하며 지조가 곧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3세에 부친을 잃었으며, 차츰 장성하자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어 스스로 부지런히 학문에 힘썼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으며, 관청에 있을 때에는 한 마음으로 봉직(奉職)하였다. 사람들과 교류할 때에는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으며, 언론과 풍지(風旨)가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다.[「윤유근묘갈명」]

1635년(인조 13) 성균관 유생들이 율곡이이와 우계성혼을 퇴계이황처럼 문묘에 종사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는데, 나이가 많았던 유생 윤유근이 이를 주도하였다. 당시 동인들은 광해군(光海君) 때 북인(北人)정인홍(鄭仁弘)의 옛 수법을 그대로 답습하여 온갖 방법으로 이를 저지하였다. 이에 비록 서인의 유생이라고 일컫는 자들도 두려워하며 후퇴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홀로 의연히 동요하지 않고 동인의 이론을 배척하였으며, 많은 유생들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가서 복합(伏閤)하였다. 그가 소두가 되어 율곡이이와 우계성혼을 문묘에 배향(配享)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고 상소를 여러 번 올려, 동인의 집정자(執政者)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윤유근묘갈명」]

효종 때 외직으로 나가서 의성현감이 되었는데, 청렴하고 공평하게 고을을 다스렸다. 그러나 1655년(효종 6) 2월 당시 암행어사였던 이연년이 남인 허적의 사주를 받고 기어이 그를 중상모략하려고 하였으나 흠잡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자 “양인(良人)을 억압하여 천인(賤人)으로 만들었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대질 심문을 하게 되자, 호조 판서허적은 그에게 말하기를, “지난번 많은 선비를 쫓아낼 때는 어쩌면 그리도 담담하더니, 지금은 어쩌면 이처럼 곤궁한가.” 하였다. 마침내 윤유근은 영평현(永平縣)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에 의성(義城)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추모하고 상소하여 그의 억울함을 아뢰었다. 이때 효종이 크게 깨닫고 허적 등의 관직을 모두 파면하였으며, 특별히 윤유근을 사면하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윤유근묘갈명」]

윤유근은 문장이 풍부하고 화려하였으며 글씨의 필법도 신묘하였으므로, 선배들은 그를 몹시 칭찬하고 소중히 여겼다. 도목정사(都目政事) 때마다 서인들이 윤유근을 청요직(淸要職)에 등용하자고 의논하였으나, 그는 이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정양, 박석과 막역한 교분이 있어서, 언제나 산수가 좋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유람을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부러워하였다.[「윤유근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洲)에 있는데, 한수재(寒水齋)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처음에 경기도 포천(抱川) 영평현(永平縣)의 보장산(寶藏山)에 장사를 지냈는데, 뒤에 종손 윤명채(尹明采)가 양주의 선영 곁으로 이장하였다.[「윤유근묘갈명」]

첫째 부인 최씨(崔氏)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추증된 최유함(崔有涵)의 딸이다.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윤기경(尹起卿)이며, 딸은 이서(李緖)에게 출가하였다. 둘째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도사(都事)권필중(權必中)의 딸이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윤시경(尹時卿)과 윤제경(尹濟卿), 윤치경(尹致卿), 윤오경(尹五卿)이며, 딸은 현감서문재(徐文在)와 안처기(安處基), 이성민(李聖民)에게 각각 출가하였다.[「윤유근묘갈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은봉전서(隱峯全書)』
  • 『용주유고(龍洲遺稿)』
  • 『만정당집(晩靜堂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