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선(尹明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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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7년(명종 2)∼1608년(선조 41) = 62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문신. 내섬시(內贍寺)정(正)과 부평부사(富平府使) 등을 지냈으며,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자는 택중(擇中)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윤원(尹轅)이고, 어머니 안산 김씨(安山金氏)는 김광호(金光虎)의 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67년(명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방목(榜目)』] 13년 후인 1580년(선조 13)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4세였다.[『방목』] 처음에 성균관(成均館)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7품의 성균관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51 「윤명선」 이하 「윤명선사적」으로 약칭] 1586년(선조 19)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으며, 3년 상을 마치고 나서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전임되었다. 그 뒤에 병조 좌랑(左郞)을 거쳐 형조 좌랑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24년 12월 1일, 「윤명선사적」]

1592년(선조 25)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에 임명되었다. 그해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선조가 서북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는데, 왜적(倭賊)이 서울 (도성)까지 쳐들어와서 형세가 급박하게 되자,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개성의 목청전(穆淸殿)에 옮겨서 임시로 묻어두었다. 선조가 평산(平山)에 이르렀을 때 유근(柳根)·윤자신(尹自新)·이정립(李廷立) 등으로 하여금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서 행재소(行在所)에 오도록 하였는데, 윤명선이 황해도도사로서 군사를 이끌고 개성의 목청전에 묻어두었던 종묘의 신주를 평양까지 옮기는 일을 돕고 그 행렬을 호위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이 치열하게 당파싸움을 전개할 때 그는 서인의 앞장을 서서 동인을 공격하였다. 그러므로 관직에 임명되더라도 동인의 공격을 받아서 파직되거나 좌천되었다. 1594년(선조 27) 예조 정랑(正郞)을 거쳐서 부평부사(富平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이듬해에 무고를 당해서 해임되었다.[「윤명선사적」] 1596년(선조 29) 11월 장흥부사(長興府使)가 되었으나, 그가 황해도도사로 있을 때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서 파직(罷職)되었다.[『선조실록』선조 29년 11월 4일] 1597년(선조 30) 평산부사(平山府使)에 임명되었으나 참소를 당하여 부임하지 못하였고, 1598년(선조 31)에 양주목사(楊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또다시 파직되었다.[「윤명선사적」]

1600년(선조 33) 제용감(濟用監) 정에 임명되었다가, 1601년(선조 34) 봉상시(奉常寺) 정이 되었을 때 북도(北道)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평안도재상경차관(平安道災傷敬差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가 재상경차관으로서 평안도에 내려갈 때 액정서(掖庭署)의 시위하는 하인을 데리고 가서 ‘중방(中房)’이라 일컫고 여러 고을에 폐해를 끼쳤다고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선조실록』선조 34년 11월 12일]

1602년(선조 35) 내섬시 정에 임명되었다가, 가을에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으로 좌천되자, 그는 벼슬할 뜻을 버리고 병을 핑계하고 사직하였다. 6년 동안 세상과 인연을 끊고 조용히 은거하여 살았는데, 술을 마시고 친구와 어울려 낚시를 즐기고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10월 21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2세였다.[「윤명선사적」]

1623년(인조 즉위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서인이 정권을 잡자,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윤명선사적」]

성품과 일화

윤명선의 생김새는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며, 풍채가 매우 훤칠하였다. 기개와 도량이 엄정하고 굳세어서 남들이 쉽게 범접하지 못하였다. 집안에서는 온화하고 바르게 집안일을 다스리고, 관직에 나가서는 청렴하고 신중하게 나랏일을 처리하였다. 다만 그는 악을 미워하고 정도(正道)를 굳건히 지키는 것이 항상 지나쳐서, 남들이 그를 매우 꺼려하였다. 그러므로 윤명선은 벼슬에 임명되어도 오래가지 못하고, 남의 탄핵을 받아서 파면과 좌천을 면하지 못하였다. 평소에 그는 남과 교유(交遊)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또 출세하려고 굳이 남들을 따라 부앙(俯仰)하지도 않았다.[「윤명선사적」]

사관(四館 : 성균관·예문관·승문원·교서관)에 근무할 때에 동인(東人) 이정우(李廷友)의 무리가 상소하여 율곡(栗谷)이이(李珥)를 헐뜯자, 윤명선이 그들을 탄핵하여 벼슬을 그만두게 하려고 생각하여, 동료들과 더불어 만나서 상의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모두들 동인에 의하여 움직이는 시론(時論)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피하고 앞장서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격분한 윤명선은 홀로 나서서 그들을 탄핵하여, 모두 파직시켰다. 그러나 윤명선은 동인의 공격 목표가 되어서, 그가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항상 동인의 탄핵을 당하여 파면되거나 좌천당하였던 것이다.

윤명선이 젊어서 외지에 우거(寓居)할 때 우연히 기자헌(奇自獻)과 더불어 친근하게 지냈다. 그때 기자헌이 벼슬이 나가서 현달(顯達)하지 않았던 시기였으므로, 서로 만나서 친구로서 애지중지하게 여기면서 자주 쓸데없는 말도 많이 하였다. 그러나 윤명선은 그때 기자헌의 사람됨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서 절교하고 왕래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기자헌은 윤명선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가, 기자헌이 출세하여 득세하게 되자, 기자헌이 특별히 모함하는 것이 심하여, 윤명선이 관직에 임명하게 되면, 번번이 대간(臺諫)들을 부추기어 윤명선의 비행을 들춰내어 탄핵하게 하였다. 일찍이 윤명선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평안도에 경차관으로 갔을 때 한 고을 수령이 세력을 믿고서 탐오(貪汚)한 짓을 하는 것을 적간(摘奸)한 적이 있었는데, 그 수령은 바로 기자헌의 주구(走狗)였다. 이러한 사건도 기자헌이 윤명선을 헐뜯는 하나의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윤명선사적」]

<임진왜란>에서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 ‘위사공신(衛社功臣)’을 녹훈할 때, 그를 싫어하던 자들이 헐뜯기를, “종묘사직의 신주를 호위해서 받들고 가다가, 황해도와 평안도의 경계선 가까이 이르러서 머뭇거리다가 뒤떨어졌다.”고 하여 그가 공신록(功臣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이것은 대개 당시에 이미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위험한 지역을 벗어났으므로, 도(道)의 경계선을 넘기를 주저한 것은 한 지방을 맡아보는 도신(道臣)은 각기 자기 도(道)의 경계 안을 지키는 것이 그 직분이기 때문이다.[「윤명선사적」]

만년에 윤명선은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면서 친구와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고 낚시질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때 시골에 파묻혀서 사는 선비 석전(石田)성로(成輅)와 더불어 절친한 친구가 되어서. 서호(西湖)에 있는 집 하나를 깨끗하게 청소한 다음에 그곳에서 술을 마시고, 초야(草野)에 묻힌 사람들이 쓰는 두건과 신발을 신고서, 서로 강호(江湖) 사이를 이리저리 왔다가 갔다가 하면서 낚시질하였다. 윤명선은 은거할 때 마치 세상과 초연하여 세상일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윤명선사적」]

그의 형님이 나이 20여 세에 세상을 떠나자, 과부가 된 형수를 받들고 한 집에 살면서 매우 극진하게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둘째 아들 윤흥파(尹興坡)를 양자를 보내어 그 뒤를 잇게 하였다. 또 누이 두 사람이 난리로 인해서 가족을 모두 잃고 그에게 와서 의탁하였는데, 그가 공무를 수행하는 바쁜 여가에도 힘을 다해서 누이들을 구휼(救恤)하였다.[「윤명선사적」]

묘소와 후손

윤명선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귀천리(龜川里) 초갈산(草葛山)의 언덕에 있는데, 사적(事蹟)이 남아 있다.[「윤명선사적」]

부인 여주 이씨(驪州李氏)는 서윤(庶尹)이승서(李承緖)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장남은 윤기파(尹起坡)이고, 차남은 윤흥파(尹興坡)이다.[「윤명선사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고산유고(孤山遺稿)』
  • 『사류재집(四留齋集)』
  • 『월사집(月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