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尹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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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6년(인조 14)∼1694년(숙종 20) = 59세]. 조선 후기 현종(顯宗)~숙종(肅宗)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와 강릉부사(江陵府使) 등을 지냈고,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자는 자일(字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성남(城南)에 거주하였다. 아버지는 호조 참판에 추증된 윤지선(尹止善)이고,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이종택(李宗澤)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에 추증된 윤영(尹泳)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낸 윤사흠(尹思欽)이다. 영의정윤인경(尹仁鏡)의 5대손이기도 하며, 효자로 정문(旌門)된 목사(牧使)윤면원(尹勉遠)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현종 시대 활동

1657년(효종 8)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1663년(현종 4) 식년(式年)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성균관에 분속되어 승정원 가주서(仮注書)가 되었다.[『한수재집(寒水齋集)』 권25 「부윤윤공리신도비명(府尹尹公理神道碑銘)」 이하 「윤리신도비명」으로 약칭]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1666년(현종 7) 보안찰방(保安察訪)에 임명되었다. 이해 겨울에 조정에서 특별한 천거가 있어서, 윤리(尹理)를 비롯하여 신익상(申翼相)과 윤지완(尹趾完) 등 6인이 함께 승륙(陞六)되어 참상관(參上官)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간(臺諫)에서 관품(官品)과 직질(官秩)은 규정이 있으므로 한 번의 천거로써 초자(超資)하여 승진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모두 참하관의 직급으로 환원되었다.[「윤리신도비명」] 1668년(현종 9) 관품과 직질이 만료되자 순서대로 정6품의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되고 공조 좌랑과 호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병조 좌랑으로 전임되다가 병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여 춘추관(春秋館)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윤리신도비명」]

1669년(현종 10) 11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가 되었다가, 1670년(현종 11)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자청하여 전주판관(全州判官)에 임명되었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10년 11월 1일] 그러나 늙은 부모가 거주하고 있는 곳에서, 임지가 너무 멀다고 정문(呈文)하였으므로 교체되었다.[「윤리신도비명」] 이어 그해 3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는데, 사헌부 장령(掌令)이휴징(李休徵)과 함께 “포도대장(捕盜大將)이 도적을 제때에 잡아서 다스리지 못하였다.”고 탄핵하였다.[『현종실록』현종 11년 3월 6일, 현종 11년 3월 11일] 그러나 그 일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면서 두 사람은 인피(引避)한 끝에 체직되었다.[『현종개수실록』현종 11년 3월 11일] 그 뒤에 사헌부와 사간원(司諫院) 양사(兩司)에서 사간원 정언(正言)과 사헌부 지평, 사헌부 장령을 거의 1년 동안 번갈아 역임하였다.[「윤리신도비명」] 1671년(현종 12) 2월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금산군수(金山郡守)로 나갔다.[『현종실록』현종 12년 2월 10일] 1673년(현종 14) 부친상을 당하였고, 이듬해인 1674년(현종 15)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제를 둘러싸고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사이에서 <제2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이 발생하였다.[「윤리신도비명」] 이때 서인이 예송논쟁에서 패배하여 화를 당하자, 그는 성남(城南)의 집으로 돌아가서 마치 그곳에서 여생을 마칠 듯이 조용하게 지냈다.[「윤리신도비명」]

숙종 시대 활동

1677년(숙종 3) 함경도의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었는데, 임기가 만료되자 1679년(숙종 5) 체직되어 성남의 집으로 돌아왔다.[「윤리신도비명」]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면서 남인(南人)이 조정에서 물러나면서 서인(西人)이 정권을 잡았다. 이에 윤리는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었고,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어 보사 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에 책훈(策勳)되었으며, 이어 제용감(濟用監)정(正)에 임명되었다. 그 뒤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으며, 여러 차례 사간원 헌납(獻納)에 의망(擬望)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6년 7월 5일] 그해 겨울에 온성부사(穩城府使)가 결원되자, 그가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여 온성부사에 임명되었다.[「윤리신도비명」] 당시 조정에서는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당쟁을 벌였는데, 관리들 가운데 권세와 이익을 탐내는 자들은 유리한 쪽으로 붙좇았으나, 그는 서인으로서 확고한 지조를 지켰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훌륭하게 여겼으나 남인들 가운데에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윤리가 온성부사로 임명된 것도 비록 승진이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남인들이 그를 정권에서 소외시킨 것이었다.[「윤리신도비명」]

1681년(숙종 7) 9월 온성부사이던 윤리가 상소(上疏)하여 함경도(咸鏡道) 6진(鎭)의 묵은 폐단을 11조목으로 나누어 자세히 진달(陳達)하였다. 숙종이 그 상소를 비변사(備邊司)에 내려서 폐단을 개혁하도록 명하니, 비변사에서 2가지만 제외하고 나머지 9가지의 폐단을 개혁하였다.[『숙종실록』숙종 7년 9월 22일] 1682년(숙종 8) 병으로 온성부사에서 체직되어 군직(軍職)에 임명되었다가, 연달아 승정원의 직임에 의망되었다.[「윤리신도비명」] 1683년(숙종 9) 병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8월 사헌부에서 “병조 참의윤리는 자질이 본래 가볍고 명성도 드러나지 않았으니,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라고 탄핵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숙종실록』숙종 9년 8월 10일, 「윤리신도비명」] 그 뒤에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다가, 이듬해인 1684년(숙종 10)에 사임하고 성남의 집으로 돌아왔다.[「윤리신도비명」]

1685년(숙종 11)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숙종실록』숙종 11년 2월 4일, 「윤리신도비명」] 그해 2월 사헌부 장령이국방(李國芳)이 아뢰기를, “동부승지윤리는 인망(人望)이 본래부터 부족하여 승지의 직임에는 합당하지 못합니다. 그를 교체하여 임명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숙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다.[『숙종실록』숙종 11년 2월 5일] 그 뒤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참의로 옮겼으며, 이어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쫓겨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윤리는 경주부윤에서 파직당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양주(楊州)의 선영 아래 움막집에서 살면서 다시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윤리신도비명」]

1694년(숙종 20) 강릉부사(江陵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부임하지 않았다. 그해 초봄부터 병색이 짙어져서 들 것에 실려서 양주의 움막에서 성남의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해 6월 초1일 성남의 본가(本家)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59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숙종이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치부(致賻)하였다.[「윤리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윤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생김새는 두툼한 얼굴에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웠다. 성품이 너그럽고 곧아서 평생 모든 이해득실(利害得失)과 세상 영욕(榮辱)을 일체 도외시하고 살았다.[「윤리신도비명」]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그는 국가 정책의 중요한 사안을 많이 건의하였는데, 내수사(內需司)에서 어민(漁民)들에게 어량(魚梁)을 침탈하는 일과 공주(公主)의 집을 제도 규정에 넘치게 화려하게 짓는 일, 그리고 관청에서 ‘팔포(八包) 무역’을 하여 자체 경비에 보태는 일, 부역(賦役)을 고르게 매겨서 백성을 편하게 할 일 등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때마다 그는 강력히 자기주장을 고집하여 관철시켰다. 또 남의 과실을 들추어내면서도 절대로 자기 뜻을 굽혀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다. 지방 수령으로 있을 때에는 아전을 단속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급선무로 삼았다. 전고(典故)에 밝아서 정사를 신속하게 재결(裁決)하였으며, 공명하고 청렴 정직하게 처신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정을 봐달라고 그에게 부탁하지 못하였다.[「윤리신도비명」]

일찍이 윤씨(尹氏) 성을 가진 자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으면서 불의(不義)한 짓을 많이 행하다가, 관찰사로부터 질책을 받은 일이 있었다. 관찰사와 동서간이 되는 그 고을 사람이 윤리의 집안과도 가까운 일가친척이었다. 그러므로 그 윤씨 집에서는 윤리가 그 고을 사람과 짜고 그 일을 사주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그 아들이 골수에 사무치도록 깊은 원한을 품었다. 그러나 윤리는 실지로 그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었다. 그 뒤에 윤리가 병조 참의와 승지가 되었을 때 그 윤씨의 아들이 대간이 되어서 전일의 원한을 품고 자기가 발론(發論)하거나, 혹은 자기편 사람을 시켜서 마구잡이로 공격하고 중상모략 하였다. 그러나 이조 판서(判書)이익(李翊)이 상소하여 그를 변호하였고, 영의정김수항(金壽恒)이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그의 억울함을 변명하였다. 그리하여 숙종이 전후로 대간에서 탄핵한 상소를 잘못이라고 여기고, 도리어 “승정원을 출입하는 자로서 누가 윤리보다 나은 자가 있겠는가.” 라며 윤리를 옹호하여 끝내 대간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때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이런 일에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은 듯이 보였다.[「윤리신도비명」]

온화하고 즐거운 기색으로 몸과 마음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고, 삼년상을 마친 뒤 기제일(忌祭日)을 당할 때마다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마치 막 초상을 당하였을 때와 같이 하였다. 또 모친의 얼굴을 직접 뵙지 못한 것을 지극히 가슴 아프게 여겨, 일찍이 모친이 쓴 언문(諺文) 편지 한 장을 구한 후 상자 속에 고이 간직해두었다. 그것을 어루만지고 읽을 때마다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그가 사는 집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였고, 처자식은 항상 굶주리는 기색이 많았다. 여러 주군(州郡)을 두루 다스리면서 청렴하고 검약하기가 한결 같았는데, 함경도 경성판관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마침 북방의 몹시 추운 겨울날이었으므로, 어떤 사람이 표범 가죽 하나로 조그만 조끼를 만들어서 그에게 입으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치 못 들은 체하고 이를 받아 입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일이 지금까지 북방의 사람들 사이에 미담(美談)으로 전해오고 있다.[「윤리신도비명」]

그는 분수를 지키고 깨끗하고 바르게 살았으며, 오직 집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는 평소 글 읽기를 좋아하여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가 지은 글이 매우 많았으나, 거의 산질되어 없어졌다. 만년에 읊은 시 몇 편만이 그 집에 남아 있어서 후손들이 갈무리하고 있다.[「윤리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송산(松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한수재(寒水齋)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1718년(숙종 44) 넷째 아들 윤양래(尹陽來)가 대신으로 출세하였기 때문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윤리신도비명」]

부인 흥양 이씨(興陽李氏)는 사인(士人) 이의윤(李義胤)의 딸인데,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네 아들은 모두 문장과 명망이 사류(士類)들 사이에 높았다. 장남 윤창래(尹昌來)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좌랑을 지냈고, 차남 윤석래(尹錫來)는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병조 참판을 지냈다. 3남 윤익래(尹益來)는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4남 윤양래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1품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돈녕부(敦寧府)판사(判事)를 지냈다. 두 딸은 강태상(姜泰相)과 이현명(李顯命)에게 각각 시집갔다.[「윤리신도비명」]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수재집(寒水齋集)』
  • 『서암집(恕菴集)』
  • 『서파집(西坡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