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尹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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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6년(선조 39)∼1637년(인조 15) = 32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과 이조 정랑(正郞)등을 지냈다. 자는 군평(君平)이고, 호는 취성옹(醉醒翁)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해숭위(海嵩尉)윤신지(尹新之)이고, 어머니 정혜옹주(貞惠翁主)는 선조(宣祖)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윤방(尹昉)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윤두수(尹斗壽)이다. 이조 참판(參判)윤지(尹墀)의 동생이기도 하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19세였다.[『방목(榜目)』] 그리고 1628년(인조 6)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3세였다.[『방목』] 그해 12월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정자(正字)에 보임되었는데 춘추관(春秋館)사관(史官)을 겸임하였고, 예문관(藝文館)봉교(奉敎)를 거쳐,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6년 12월 13일],[『서석집(瑞石集)』 권16 「통훈대부행이조정랑지제교겸세자시강원문학윤공묘표(通訓大夫行吏曹正郞知製敎兼世子侍講院文學尹公墓表)」 이하 「윤구묘표」]

1629년(인조 7) 2월 예문관에 들어갈 때 정태화(鄭太和)와 함께 역사 부문인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시험에서 ‘약(略)’의 점수를 받았다.[『응천일록(凝川日錄)』 권4] 8월 예문관 봉직(奉直)이 되어, 춘추관 기사관(記事官)과 세자시강원 설서를 겸임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7년 8월 25일] 1630년(인조 8) 2월 병조 좌랑(左郞)에 임명되었다가, 7월에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거쳐, 12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인조실록』 8년 9월 5일),[『승정원일기』인조 8년 2월 9일],[『승정원일기』인조 8년 7월 16일],[『승정원일기』인조 8년 12월 4일] 1631년(인조 9) 1월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가, 8월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옮겼고, 윤11월 홍문관 교리(校理)를 거쳐, 12월에는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인조실록』 9년 5월 3일),(『인조실록』 9년 8월 26일),(『인조실록』 9년 윤11월 20일),[『승정원일기』인조 9년 12월 18일] 1632년(인조 10) 7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인조실록』 10년 7월 21일)

1633년(인조 11) 5월 대신을 숭은전(崇恩殿)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올릴 때 제주(題主)를 고치는 분황제(焚黃祭)를 거행하였는데, 윤구(尹坵)가 대축(大祝)으로 축문(祝文)을 읽었다고 하여 그에 준하는 관직을 내리라는 왕명이 있었다.(『인조실록』 11년 5월 12일) 그리하여 그해 6월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이어 용양위(龍陽衛) 부사직(副司直)이 되었고, 10월 지제교(知製敎)와 춘추관 기주관(記註官)을 겸임하였다.(『인조실록』 11년 6월 20일),[『승정원일기』인조 11년 6월 7일],[『승정원일기』인조 11년 10월 25일] 1634년(인조 12) 12월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겸임하였다.[『승정원일기』 12년 12월 5일] 1635년(인조 13) 1월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되어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었는데, 지제교와 세자시강원 사서를 겸임하였다.(『인조실록』 13년 1월 26일),[『승정원일기』인조 13년 1월 26일]

1636년(인조 14) 2월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체찰부(體察府)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인조실록』 14년 2월 9일)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청(淸)나라 군사가 서울 근교로 육박해 오자,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체찰부에서 윤구에게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그는 혹독한 눈보라 속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성안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을 독려하다가 결국 피로가 쌓여 병을 얻었다.[「윤구묘표」]

1637년(인조 15) 윤4월 이조 정랑(正郞)이 되었다가, 8월 대간(臺諫)의 관직에 의망(擬望)되었다.(『인조실록』 15년 윤4월 27일) 그때 좌의정최명길(崔鳴吉)이 “강화도를 지키던 두세 신하들이 역경을 만나, 윤방은 이미 파직 당하였고, 강석기(姜碩期)는 근일에 삼사(三司)의 탄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바야흐로 탄핵을 받고 있는데 그 손자를 어찌 대간의 관직에 임명할 수 있겠습니까. 윤구(尹坵)를 개차(改差)하고 공론을 기다리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인조실록』 15년 8월 15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5일간 버티다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였는데, 인조가 환도할 때 윤구도 어가를 따라 서울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국난으로 행정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공무에 힘쓰다가 병이 더욱 깊어져 그해 9월 17일 갑자기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당시 나이가 32세였다. [「윤구묘표」]

성품과 일화

윤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생김새가 장중하고 성품이 온순하였으며 행동을 조심하였다. 어린 아이 때부터 형 윤지와 함께 할아버지 윤방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가학(家學)을 통하여 학문에 대한 뜻을 독실하게 가지면서 간곡하고 정성스럽게 유학의 법도를 준수하였고, 더욱이 마음을 깊고 고요하게 가져 남과 다투는 법이 없었다.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면서 깊이 공경하고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다. 성품이 간결하여 평소 방을 깨끗이 쓸고 닦고서, 좌우에 도서를 정리해 두고 책을 읽었으며, 사람들과 상접(相接)하는 일이 드물었다.[「윤구묘표」] 그는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이 강직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떤 일에 반대하여 자기 의론을 주장할 때에는 너무나 의연하여 누구도 그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1629년(인조 7) 7월 윤구가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인목대비가 새로 천장(遷葬)한 목릉(穆陵 : 선조의 능)에 참배하겠다는 명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인이 남자의 무덤에 가는 것은 예(禮)가 아닙니다. 시정(市井)의 무지한 필부(匹婦)들도 이런 일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자전(慈殿)은 국모로서 온 나라의 본보기가 되는데, 어찌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불가함을 지적하였다. 이에 인목대비가 크게 진노하였고, 인조는 그의 계사(啓辭)가 공경스러움이 부족하다고 하여 그를 특별히 체직(遞職)시켰다.[「윤구묘표」]

1637년(인조 15) 2월 윤구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다음날부터 인조에게 상소를 올리고 허락을 받아 부모님이 어디에 계신지 분주히 찾아 다녔는데, 갑자기 길을 가로막고 사람과 물건을 마구 약탈하는 오랑캐의 적진(賊陣)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때 오랑캐 기마병들이 활을 겨누고 있었으므로 하인은 공포에 질려 사색이 되어 도망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나아가면 근심이 없겠지만, 물러난다면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더니, 빨리 말을 몰아 오랑캐 진영의 한 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면서 그 군사에게 “나는 관인(官人)으로 강화도에 일이 있어서 가는 길이다.” 하였다. 오랑캐 군사들이 빙 둘러서 있다가 놀라서 길을 비켜주고 쫓아오지 않았다. 당시 호란(胡亂)을 막 겪고 난 후였으므로 처자식에게 변변한 옷 한 벌도 장만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누군가가 그에게 솜옷을 선물로 주겠다고 하였다. 그가 그 말을 듣고 “지금 이런 때에 누구에게 남아도는 것이 있겠는가. 이런 때에 선물을 받는 것은 더욱 불가하다.”며 거절하고 끝내 솜옷을 받지 않았다. [「윤구묘표」]

그는 부귀한 집에서 자랐지만 가난한 선비처럼 자신을 수양하였고, 청현직(凊顯職)의 높은 관직에 올랐어도 벼슬이 낮은 처사(處士)처럼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지켰다. 한 가지 일에 뜻을 모으고, 오로지 근엄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여, 여러 사람 가운데 우뚝 서니,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머지않아 성세(盛世)의 정간(楨幹)이 되리라고 기대하였다.[「윤구묘표」]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적성(積城) 북면(北面) 통귀리(通貴里)에 있는데, 김만기(金萬基)가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윤구묘표」]

부인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중추부(中樞府) 영사(領事)김신국(金藎國)의 딸인데,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4촌인 윤게(尹垍)의 차남 윤세휴(尹世休)를 양자로 삼았는데, 윤세휴는 현감(縣監)을 지냈다.[「윤구묘표」]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서석집(瑞石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택당집(澤堂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혼정편록(混定編錄)』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남계집(南溪集)』
  • 『성옹유고(醒翁遺稿)』
  • 『묵수당집(嘿守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