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겸(尹㻩)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601년(선조 34)∼1665년(현종 6) = 65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 등을 지냈다. 자는 여옥(汝玉)이고, 호는 오옹(梧翁)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 판관(判官)윤경승(尹慶承)이고, 어머니 공주 이씨(公州李氏)는 참봉(參奉)이익(李釴)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정랑(正郞)윤정(尹渟)이며, 양증조할아버지는 이조 정랑윤희성(尹希聖)이고, 친증조할아버지는 윤희천(尹希天)이다. 낙정(樂靜)조석윤(趙錫胤)과 송곡(松谷)조복양(趙復陽)과 절친한 사이였다.

인조~현종 시대 활동

1627년(인조 5)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방목(榜目)』] 이때 둘째 형 윤성(尹珹)과 같이 합격하였다.[『명곡집(明谷集)』 권24 「시강원필선윤공묘갈명(侍講院弼善尹公墓碣銘)」 이하 「윤겸묘갈명」으로 약칭] 1628년(인조 6)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방목』]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정자(丁字)에 보임되었다가,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6품의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윤겸묘갈명」]

1632년(인조 10) 2월 윤겸(尹㻩)은 영숭전(永崇殿)참봉(參奉)이 되었다가. 그해 5월 추숭도감(追崇都監) 감조관(監造官)으로 승진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0년 2월 22일, 인조 10년 5월 8일] 1634년(인조 12) 윤8월에도 부묘도감(祔廟都監)낭청(郎廳)이 되었고, 1649년(인조 27) 4월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2년 윤8월 21일, 인조 27년 4월 26일]

이어 1650년(효종 1) 1월에는 사헌부 장령이 되었으며, 1652년(효종 3) 사간원 헌납을 거쳐 그해 8월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1년 1월 25일, 효종 3년 6월 13일, 효정 3년 8월 19일] 이후에도 윤겸은 여러 차례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였다.[『효종실록』효종 7년 4월 23일, 효종 7년 5월 28일, 효종 7년 7월 18일]

1661년(현종 2) 4월에는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2년] 1662년(현종 3) 평산부사(平山府使)가 되었다. 그해 7월 궁가(宮家)에서 평산부(平山府) 음촌(陰村) 사방(四坊)에서 1천여 호(戶)가 개간한 전지(田地)를 점유하였다. 그런데 평산부사윤겸이 영문(營門)에 보고하지도 않고 곧바로 성책(成冊)하여 호조에 보냈기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체포되어 서울로 잡혀 와서 심문을 당하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정죄(定罪)하니, 현종이 그를 파직하고 고신(告身)을 빼았었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3년 7월 1일, 현종 3년 7월 13일, 현종 3년 8월 4일, 현종 3년 12월 13일] 1664년(현종 5) 10월 봉상시(奉常寺)정(正)으로 있을 때 구언(求言)하는 교지(敎旨)에 응하여 상소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4가지였는데, 첫째는 백성들의 민원을 풀어 주고, 둘째는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을 신원하며, 셋째는 나라의 유현(儒賢)을 예우하고, 넷째는 나라의 기강(紀綱)을 세우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현종이 너그럽게 비답(批答)하고 그의 상소를 비변사(備邊司)에 내렸다.[『현종실록』현종 5년 10월 21일]

1665년(현종 6) 12월 9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5세였다.[「윤겸묘갈명」]

궁가(宮家)의 평산 토지 점유와 평산 부사 윤겸

1662년(현종 3) 7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홍처윤(洪處尹)이 치계하기를, “도내의 평산부 음촌 사방에서 수천여 호가 개간한 전지는 모두 계묘년의 양안(量案)에 들어가 있으므로 어떤 조그마한 전지도 탁지(度支)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반역한 집안의 노자(奴子)들이 속여서 궁가에 알린 탓으로 거의 1천여 호가 날마다 경작하는 전지 모두가 모조리 궁가에 의해 점유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평산부사윤겸이 영문에 보고하지도 않고서 곧바로 성책하여 해조에 보냈으니, 놀랍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평산부의 해당 관리를 이미 잡아들여 엄히 형신(刑訊)하였습니다. 감히 관찰사가 눈으로 본 폐단을 진달(進達)드리니, 해조로 하여금 복계(覆啓)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다.[『현종실록』현종 3년 7월 1일, 현종 3년 8월 1일, 현종 3년 8월 4일]

궁가에서 평산부 음촌에서 1천여 호가 새로 개간한 전지를 강제로 점유하였음에도 부사윤겸이 영문에 보고하지 않고 바로 성책하여 호조에 보냈기 때문에 황해도관찰사홍처윤이 부사윤겸의 죄를 중앙 정부에 보고한 것이다. 궁가는 궁전의 비빈과 총희(寵姬)를 비롯하여 왕자와 왕녀가 사는 곳을 말하는 것으로, 왕족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새로 개간한 전지를 비롯하여 전국의 산과 어량(魚梁) 등을 점거하고, 세금을 내지 않은 채 그 수확을 가로챘던 것이다. 평산부사윤겸 또한 궁가의 세력에 눌려서 그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체하였기 때문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해 9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유경창(柳慶昌)이 평산부사윤겸을 체포하여 와서 심문하고 죄를 줄 것을 청하자, 현종이 그렇게 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그해 10월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윤겸의 공초(供招)가 대부분 대계(臺啓)와 상반되고, 내사(內司)의 관원과 부화뇌동했다는 것도 본정이 아닌 듯하니, 참작해서 조율해야 하겠습니다.”하였다. 그러자 현종이 답하기를, “원정(原情) 가운데 조사할 일을 모두 일일이 분명하게 조사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그해 12월 의금부에서 윤겸의 죄는 탈고신(奪告身)에 해당된다고 아뢰니, 이에 현종이 평산 부사윤겸을 파직하고 고신(告身)을 빼앗았다.[『현종실록』현종 3년 10월 1일, 현종 3년 12월 7일, 현종 3년 12월 13일]

성품과 일화

윤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질이 너그럽고 부드러웠으나 악(惡)한 것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여겼다. 어릴 때에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명성을 듣고 한 번 만나보기를 요청하였는데 그가 이에 응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 자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뒤에 이르러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윤겸묘갈명」]

어려서 뛰어나게 영리하여 6세에 능히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읽어서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관례(冠禮)를 치르기 전에 문사(文詞)에 정진하여 와 표문(表文)을 더욱 잘 지었는데 붓을 잡으면 즉각 어귀(語句)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번번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윤겸묘갈명」]

대각(臺閣)에 있을 때는 직언(直言)을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평소 강직하여 구차스럽게 시대의 조류에 영합하지 않았다. 불가(不可)한 뜻을 가지고 있으면 비록 현달한 관리나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만년에 새로운 권귀(權貴)들과 부앙(俯仰)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그의 명성과 지위가 크게 드러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두문불출하고 종적을 감추었으며 입으로는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고 분수를 지키면서 있는 그대로 살았다.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면서 회포를 풀었으며 얻거나 잃거나 기쁘거나 슬픈 것으로 뜻을 삼지는 않았다.[「윤겸묘갈명」]

전후(前後)로 부모의 상을 당했는데 슬퍼하여 몸을 상(傷)한 것이 예제(禮制)를 넘어섰다. 우애가 돈독하여 형제가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공적인 이유가 아니면 일찍이 잠시라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교제할 때에는 성의(誠意)를 돈독하게 하기에 힘썼으며, 친구로서 교유(交遊)한 자는 모두 한 시대의 선(善)한 무리였다. 낙정조석윤과 송곡조복양, 상서(尙書)조형(趙珩), 창주(滄洲) 김익희(金益熙),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이지항(李之恒)과 서로 친하게 지냈다.[「윤겸묘갈명」]

효종(孝宗) 초기에 포저(浦渚)조익(趙翼)이 조그만 사건으로 삭직(削職)되어 축출되었는데, 대관들이 왕자의 불법을 탄핵하였다가 거듭 견책(譴責)을 당하였으므로 온 조정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가 상소하여 두 가지의 사건을 논하였는데 그 말이 심히 강경하고 간절하였으며, 악정조석윤도 나라 일을 말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렸다. 그가 또 소장(疏章)을 올려 극렬한 말로 논쟁하며 구원하였으므로 사류(士流)가 훌륭하다고 여겼다.[「윤겸묘갈명」]

군(郡)을 다스릴 적에 자신을 단속하고 주민들에게는 관대하게 하였으며, 옥사(獄事)와 소송(訴訟)은 깨끗하고 공평하니, 그가 이르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었다는 명성이 드러났다. 주민들은 그가 관직을 떠난 뒤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고 추모하였다. 양친(兩親)이 모두 관양(官養)을 누렸다.[「윤겸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부평(富平) 옥모면(玉毛面) 탄동(炭洞)에 있는데,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윤겸묘갈명」]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통덕랑(通德郞)홍사각(洪思恪)의 딸이다.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윤징하(尹徵夏)는 현감(縣監)을 지냈고, 차남 윤징은(尹徵殷)은 통덕랑을 지냈으며, 3남 윤징주(尹徵周)는 직장(直長)을 지냈다. 딸은 경력(經歷)이대(李垈)와 영장(營將)김하서(金夏瑞)에게 각각 시집갔다.[「윤겸묘갈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명곡집(明谷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백강집(白江集)』
  • 『양파유고(陽坡遺稿)』
  • 『구당집(久堂集)』
  • 『호곡집(壺谷集)』
  • 『문정공유고(文貞公遺稿)』
  • 『양곡집(陽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