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립(柳永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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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7년(중종 32)∼1599년(선조 32) = 63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병조 참판을 지냈는데, ‘7도 방백(七道方伯)’으로 유명하다. 자(字)는 입지(立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의정부 사인(舍人)유감(柳堪)이고, 어머니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돈녕부(敦寧府)동지사(同知事)조윤무(曺允武)의 딸이다. 대사간(大司諫)유헌(柳軒)의 증손이고, 영의정유영경(柳永慶)의 6촌형이며, 영의정최명길(崔鳴吉)의 외조부다. 전주 유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유혼파(柳渾派) · 유습파(柳濕派) · 유지파(柳池派) 3파가 있는데, 유영립은 시조 유습의 9대손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 1)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급제하였고, 같은 해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2세였다.[『방목』]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1574년(선조 7) 영변 판관(寧邊判官)이 되었으나, 1756년(선조 9) 수령이 임지에 데려가는 식솔인 아권(衙眷)을 데리고 부임하였다고 파직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9년 4월 15일] 그 뒤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보성 군수(寶城郡守)가 되었는데, 선정(善政)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그가 떠난 다음에 그를 추모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도곡집(陶谷集)』 권20 「병조참판 유공 묘표(兵曹參判柳公墓表)」]

1580년(선조 13)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고(『선조실록』 선조 13년 9월 18일)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 1581년(선조 14) 철산 군수(鐵山郡守)가 되었는데, 그때 암행어사(暗行御史)이산보(李山甫)가 평안도 지역을 염찰(廉察)하고, 철산 군수유영립이 선정을 베풀었다고 보고하였으므로, 선조가 그에게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다.[『선조실록』선조 14년 4월 17일]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승진되었고, 1582년(선조 15) 종성 부사(鐘城府使)가 되었다.[『도곡집』 권20 「병조참판 유공 묘표」]

1583년(선조 16) 율보리(栗甫里)와 니탕개(尼湯介)가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종성(鍾城)으로 침입하여, 종성의 성곽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종성 부사유영립은 북병사(北兵使)김우서(金禹瑞)와 함께 오랑캐를 막았는데, 온성 부사(穩城府使)신립(申砬)이 기병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여, 적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 16년 5월 1일) 종성 부사유영립은 니탕개의 침입을 방어하였다고 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585년(선조 18) 서인(西人)들이 승지유영립이 전에 종성 부사로 있을 때 니탕개와의 싸움에서 아군의 사망자를 사실대로 알리지 않았다고 비난하였으므로,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 1586년(선조 19) 종2품하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어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도곡집』 권20 「병조참판 유공 묘표」] 1588년(선조 21)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1591년(선조 24) 함경도 관찰사에 부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왜군이 강원도로 북상하여 철령(鐵嶺)을 넘어 북로(北路)의 함흥(咸興)을 함락하였다. 그러자, 함경도 관찰사유영립은 개마고원 산 속으로 도망하였으나, 추격하던 왜군에게 체포되어 가토의 군영에 붙들려 갔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의주(龍灣)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도곡집』 권20 「병조참판 유공 묘표」] 행재소에서 함경도를 방어하지 못하였다고 유영립을 견책하여 관찰사에서 파직하고, 그때 임해군(臨海君)을 따라서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려고 함경도 삼수(三水)에 머물고 있던 윤탁연(尹卓然)을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하였다. 유영립의 가족들이 왜적에게 붙잡혀서 가토의 군영이 있던 단천(端川)에 있었으므로, 유영립은 어머니를 구출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왜장(倭將)에게 보라매를 뇌물로 주고, 어머니와 가족을 구출하였다. 1597년(선조 30) 영의정유성룡이 동인의 유영립을 변호하기를, “그가 전에 종성 부사로 있을 때 일찍이 오랑캐를 막을 준비를 잘 하였으니, 수성(守城)하는 직임을 맡길 만합니다.” 하고, 그를 강력히 천거하여, 유영립은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선조 30년 1월 16일] 그해 <정유재란(丁酉再亂)>을 맞아서, 병조 참판유영립은 군사의 실무를 맡아 동서분주하다가, 전쟁이 끝날 무렵 1599년(선조 32) 1월 14일에 갑자기 돌아갔는데, 향년이 63세였다.[『도곡집』 권20 「병조참판 유공 묘표」]

종성 부사 유영립의 오랑캐 나탕개의 침입 방어

두만강 연안 회령(會寧)을 중심으로 만주 동남부의 동여진을 지배하던 건주좌위(建州左衛) 오도리(斡朶里)족의 대추장 동맹가(童孟哥) 티무르가 목단강(牧丹江) 연안 영고탑(寧古塔)에 살던 해서위(海西衛) 홀라온 우디캐(兀狄哈)의 침입을 받아서, 1433년(세종 15년) 동맹가 티무로 부자가 살해당하자, 두만강 일대의 여진의 중심 세력이 사라져버렸다. 세종은 이 기회를 틈타서 만주 동남부의 고구려와 발해의 옛영토를 회복하려고, 좌승지김종서(金宗瑞)를 함경도 도관찰사(咸鏡道都觀察使)에 임명하여 6진(六鎭)을 개척하게 하였다. 김종서는 8년 동안 두만강을 따라서 5진(五鎭)을 설치하고, 두만강 이남을 조선의 국토로 만들었다. 그 뒤에 황보인(皇甫仁)을 보내어 두만강 가에 5진을 연결하는 행성(行城)을 구축하여 오랑캐의 침입을 철저하게 방비하였다. 이리하여 건주좌위의 오도리족과 오랑캐는 대다수 압록강 지류 동가강(佟家江: 파저강)의 건주본위(建州本衛)로 옮겨가고, 두만강 일대에는 조선에 복속하는 별종 오랑캐가 일부 남아 있었다.

세종은 김종서와 함께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방어체제를 만들어 두만강 유역에 사는 번호(籓胡)의 침입을 철저하게 방어하였다.[『제승방략(制勝方略)』] 번호란 조선에 복속하여 만주 내지(內地)의 우디캐 침입을 막아주는 울타리 노릇을 하던 두만강 유역의 오랑캐를 말한다. ‘제승방략’ 방어체제에 의하여 조선은 1백여 년 동안 두만강 여진족을 방어하였으나, 16세기 들어와서 중종 때부터 ‘제승방략’ 방어체제가 점차 무너지면서 번호가 조선의 지배를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선조 때 <임진왜란> 직전인 1583년(선조 16) 5월 오랑캐 추장 니탕개가 오랑캐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원래 회령 부근의 번호 추장 니탕개는 조선에 복속하여 조선의 관직을 받고 후한 대접을 받았으나, 그때 회령의 수장(守將)이 그의 충성을 의심하여 홀대하자, 니탕개는 불평을 품고 이웃 부락의 추장(酋長)을기내(乙其乃)와 율보리 등과 오랑캐 군사를 모아서 기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먼저 경원(慶原)을 침범하였다. 경원 부사김수(金璲)가 그들과 싸우다가 경원성이 함락되어 죽었다. 그들은 계속하여 경원에 소속된 아산(阿山) · 안원(安原) 등의 진보(鎭堡)를 함락한 다음에 여세를 몰아서 두만강 중류에 있는 종성을 포위 공격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16년 2월 1일]

번호의 대추장 율보리와 니탕개가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종성으로 쳐들어왔다. 종성 부사유영립은 무장(武將)들에게 ‘제승방략’ 방어체제에 의하여 오랑캐의 침입하는 길의 요해처(要害處)에서 매복하였다가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우후(虞侯)장의현(張義賢), 판관(判官)원희(元喜), 군관권덕례(權德禮) 등이 기병과 보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두만강 여울을 지키면서 침입하는 오랑캐 군사와 대적해서 싸웠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권덕례가 피살되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해 성으로 돌아오자, 오랑캐 군사들이 추격하여 종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종성 부사유영립은 북병사김우서와 함께 독전(督戰)하였는데, 만호최호(崔浩) 등이 조전장이천(李薦) · 이영침(李永琛) 등과 같이 강한 쇠뇌[弩]로써 사격하여, 오랑캐 군사의 예봉(銳鋒)을 꺾으니, 적이 물러갔다. 그 후에 율보리와 니탕개가 많은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다시 방원보(防垣堡)를 포위 공격하였는데, 최호가 조방장이발(李*) 등과 함께 성에 올라가서 힘껏 싸웠다. 그때 종성 부사유영립이 우후장의현과 판관윤침(尹諶) 등에게 종성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군사들이 안팎에서 합세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서 크게 오랑캐 군사를 공격하니, 적이 마침내 대패하여 물러갔다.[『국조보감(國朝寶鑑)』권28] 이로써 니탕개의 반란은 일단 기세가 꺾였다.

니탕개가 반년 동안 여러 번 국경을 침입하였으나, 패전만 거듭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었으므로, 번호들이 모두 후회하고 다시 조선에 복속하였다. 그러나 율보리와 니탕개만은 만주 내지(內地)로 깊숙이 도망해 들어갔다. 처음에 온성 부사신립(申砬)은 군사를 이끌고 종성으로 가서 독전하여 수백 급(級)의 목을 베자, 오랑캐 군사들은 퇴각하여 달아났다. 그 뒤에 신립은 니탕개를 유인하여 생포하고, 서예원(徐禮元)은 율보리 등을 유인하여 생포하여, 국경에서 니탕개와 율보리 두 추장을 모두 목베었다.[『난중잡록(亂中雜錄)』]

니탕개가 반란을 일으켜서 침입했을 때 당시 병조 판서로 있던 율곡(栗谷)이이(李珥)가 제의하기를, “자원하여 6진(六鎭)에 나가서 3년을 근무하는 사람은 서얼(庶孼)이라도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고, 공사(公私)의 천인(賤人)은 양민(良民)으로 면천시키자.”고 하니, 동인들이 이에 반대하였다. 또 니탕개가 함경도 종성을 포위 공격하자, 아주 급박한 상황이라고 인식한 병조 판서이이가 전군에 출전 명령을 내렸는데, 동인들은 이이가 병권을 마음대로 휘두른다고 견제하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니탕개 반란 사건을 계기로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더욱 격화되기 시작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16년 4월 1일)

성품과 일화

선조는 장차 시사(時事)가 어지러워질 것을 미리 알고 의정부 대신들에게 뛰어난 큰 인물을 추천하라고 하였을 때, 영의정유성룡이 용모가 씩씩하고 기개가 있고 논리를 잘 전개하는 자라고 하여, 유영립과 정언신(鄭彦信) · 장운익(張雲翼)을 추천하였는데, 선조가 모두 품계를 따지지 않고 발탁하였다. 도곡(陶谷)이의현(李宜顯)이 유영립의 묘표(墓表)를 지을 때 그의 가장(家狀)에서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다.”는 표현이 실제와 부합되는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의현은 “유영립의 병조 참판 임용은 실제로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고, 또 “혹자는 유영립이 왜적에게 붙들렸던 사실을 흠이라고 말하기도 하나 이는 그렇지 않다.” 하고, 유영립이 험난한 길을 목숨을 걸고 행재소로 달려가서 선조를 호위(扈衛)하였고,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서, 끝내 항복하지 않고 몸을 빼내어 탈출하여 돌아왔다고 주장하였다.[『도곡집』 권20 「병조참판 유공 묘표」] 당시 가토의 단천(端川) 군영에는 임해군 · 순화군(順和君)과 황정욱(黃廷彧) · 황혁(黃赫) 부자 등이 같이 있었는데, 가토가 두 대군을 살려주겠다고 달래고 서인 황정욱 부자를 협박하여 선조에게 항복하라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리하여 서인은 유영립이 관찰사로서 왜적과 제대로 싸우지 않고 산 속으로 도망한 사실과 왜군에게 포로되었다가 탈출한 다음에 왜적의 진영에 남아 있는 어머니와 가족을 구원하려고 왜장에게 보라매를 뇌물로 준 사실을 비난하였고, 동인은 황정욱 부자가 선조에게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낸 것을 비난하였다. 황정욱은 서인의 거물인데, 유영립도 그만큼 동인의 거물이었다.

1585년(선조 18) 서인의 사관이 유영립을 비난한 사초(史草)를 보면, “유영립은 재기(才氣)가 노둔하여 별다른 기량도 없었으므로, 추솔하고 비루한 일개 범부(凡夫)에 지나지 않았다. 전에 종성 부사로 있을 때 두만강 여울의 싸움에서 아군의 사망자를 사실대로 알리지 않았으니, 이미 임금을 속인 죄를 지은 것이다. 후설(喉舌)의 직책을 맡아서도 천안(天顔) 을 지척에 대하고서도 또 사실대로 아뢰지 않음으로써 군부(君父)를 무시했기 때문에 탄핵과 논박을 받게 되었으니, 그의 사람됨이 볼품이 없다는 것을 이로써 알 수가 있다.”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18년 4월 28일) 여기서 후설은 승지를 가리키고, 천안은 임금의 얼굴을 말한다.

유영립은 전란 중에 돌아갔기 때문에 공가(公家)나 사가(私家)의 문적(文籍)이 흩어졌고 집안의 기록도 남아있는 것이 없었으므로, 영의정이의현이 1세기 뒤에 유영립의 묘표를 지을 때 근근히 남아 있는 자료를 모으고 야사(野史)의 기록을 참고하였다. 이의현은 두세 가지 자료에 의하여 묘표[『도곡집』 권20 「병조참판 유공 묘표」]를 지었는데, 관력(官歷)도 앞뒤가 맞지 않고 사건의 기록도 실록과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묘표와 실록을 일일이 비교하여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유영립은 ‘7도 방백’으로 유명한데, 실록과 묘표에서 1586년(선조 19)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1588년(선조 21)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1591년(선조 24)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으나, 나머지는 어느 도인지 알 수 없다. 조선 중기 유영립의 ‘7도 방백’은 조선 초기 함부림(咸傅霖)의 ‘8도 방백’ 다음으로 유명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교하(交河) 월롱산(月籠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도곡이의현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도곡집(陶谷集)』 권20 「병조참판 유공 묘표(兵曹參判柳公墓表)」] 영의정이의현의 장인 유인(柳寅)의 5대조가 바로 유영립이므로, 유영립의 묘표는 그가 죽은 뒤에 1백여 년이 지나서 영조 때 지은 것이다.

부인 수안 이씨(遂安李氏)는 정국 공신(靖國功臣) 요산군(遼山君)이기(李夔)의 딸인데, 자녀는 1남 3녀를 두었다. 외아들 유색(柳穡)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를 지냈고, 장녀는 부사최기남(崔起南)에게 출가하였다. 최기남의 아들이 영의정최명길(崔鳴吉)이다. 또 서자 유계(柳稽)와 유비(柳秠)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도곡집』 권20 「병조참판 유공 묘표」]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도곡집(陶谷集)』
  • 『계갑일록(癸甲日錄)』
  • 『계미기사(癸未記事)』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재사초(寄齋史草)』
  • 『기축록(己丑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운암잡록(雲巖雜錄)』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해동역사(海東繹史)』
  • 『혼정편록(混定編錄)』
  • 『우득록(愚得錄)』
  • 『사류재집(四留齋集)』
  • 『오봉집(五峯集)』
  • 『남계집(南溪集)』
  • 『눌은집(訥隱集)』
  • 『강좌집(江左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선양정집(善養亭集)』
  • 『동호집(東湖集)』
  • 『해월집(海月集)』
  • 『문월당집(問月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