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승방략(制勝方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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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시대 야인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함경도 8진(鎭)과 이에 소속된 각 보(堡)의 방수(防戍)를 논한 병서(兵書)다.

개설

이 책은 1588년(선조 21) 3월 당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있었던 이일(李鎰)이 처음으로 찬집하고,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1670년(현종 11) 10월에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이선(李選)이 중간한 서책이다.

‘제승방략’이란 1555년(명종 10) 일어난 을묘왜변(乙卯倭變)을 전후로 해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이르는 약 50년 간 조선 전기 이래 시행되어 온 진관체제의 변형으로 나타난 독특한 방위체제를 가리킨다. 권1의 머리에서 권2의 중반에 걸쳐 열진방어(列鎭防禦)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6진 소속의 여러 진보를 두만강 하류, 즉 경흥의 서수라(西水羅)부터 시작하여 소개하고, 다음에 부령· 종성· 명천·길주 소속의 진보에 이르는 합계 44진보에 대해 차례로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는 각 진보의 형세, 위치, 성곽, 우물, 수호병, 무기, 추·요격처, 봉수 등이 기술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의 기록에 따르면, 김종서(金宗瑞)가 조선 세종 중엽 이후 이른바 6진 개척에 종사하면서 처음 저술하고, 이를 선조 때에 이일이 증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견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근자에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도서 해제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588년(선조 21) 3월 당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있었던 이일이 처음으로 찬집하고, 그 뒤 1670년 10월에 함경북도병마평사이선(李選)이 중간한 서책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렇게 잘못 알려진 근본원인은 중간에 부기한 이선의 발문(跋文) 때문인데, 이선이 임진왜란 직전에 시행되고 있었던 우리나라의 특유한 방위체제였던 ‘제승방략’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제승방략’은 세종 대 6진 개척에 종사한 김종서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므로, 김종서의 저작설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 보는 것이다.

권1의 머리에서 권2의 중반에 걸쳐, 열진방어가 실려 있다. 그 내용은 6진 소속의 여러 진보를 두만강 하류, 즉 경흥의 서수라부터 시작하여 소개하고, 다음에 부령· 종성· 명천·길주 소속의 진보에 이르는 합계 44진보에 대해 차례로 설명을 한 것이다.

여기에는 각 진보의 형세, 위치, 성곽, 우물, 수호병, 무기, 적로상거(賊路相距), 추·요격처[應變策], 봉수, 수호처, 후망(候望), 번호(藩胡), 고사(故事) 등이 기술되어 있다. 각 진보에 따라서 복병·체탐행영전보(體探行營傳報)·해망(海望) 등이 더 추가된 곳도 있고, 혹은 이중 몇 항이 빠진 진보도 있다. 특히 경흥·경원 등에는 창상곡(倉上穀) 및 군량곡의 남아 있는 양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 제2권의 후반부에는 군정(軍政) 29조, 금령(禁令) 27조, 육진대분군(六鎭大分軍), 삼읍분군(三邑分軍), 청행제승방략장(請行制勝方略狀), 비국회관(備局回關), 방량식(放量式)이 수록되어 있다. 청행제승방략장에서 저자가 제승방략을 시행하도록 건의한 이유를 서술했는데, 남방지역에서 을묘왜변 전후부터 행해지던 특유의 방위체제인 제승방략이 북방에서는 행해지지 않고 있어, 문제가 많기 때문에 함경북도에서는 이를 도입·실시하고자 청한 것이었다.

이러한 건의에 대해 비변사는 답하여 대부분 허락하되, 함경남도 병력이 적의 침입에 앞서, 북도에 미리 분군하는 것만은 불허하고, 대신 함경북도에 변이 발생했을 때 함경남도가 무사할 경우는 언제나 관찰사의 지휘 하에 함경남도군이 즉시 북도로 달려가 구원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므로 함경남도는 제외하고, 함경북도 각 관에만 편성한 제승방략이 분군법이었다.

이것이 비국회관의 내용이다. 또 6진대분군은 6진 일대에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에 대비하여, 6진 이외 함경북도 전 지역의 병력을 집중적으로 6진 지방에 동원하되, 미리 그 직책과 부방장소를 정하여, 익히게 조처하는 것이다. 삼읍분군은 명천 등지의 내륙지방이 위급할 때 동원될 군대의 배치표이며, 6진의 그것과 원리는 비슷하나, 다만 규모가 작을 뿐이다. 방략식은 실제 사변이 발생하여, 군대를 동원했을 때 소요되는 군량수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 표(表)이다.

서지 사항

2권 1책(98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사주쌍변이고, 반엽광곽은 25.1×19.4cm이다. 10행 22자의 유계, 상하흑어미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36.6×23.8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제승방략(制勝方略)』은 조선전기 지방의 군사제도였던 진관체제를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서 독특하게 적용하였던 양계(兩界)지역의 군사제도였으나,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제승방략은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그 무력함이 드러난 남부지방의 제승방략이었다. 특히 임진왜란을 통해, 지방의 군사제도가 진관체제로 복귀하면서, 제승방략은 진관체제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은 조선 초기 김종서가 저술한 것을 1588년(선조 21)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이일이 다시 시의(時宜)에 맞게 정리, 증수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김종서의 저작설은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제승방략』은 1670년(현종 11)에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이선(李選)이 중간한 것이다.

내용은 권1과 권2의 상반까지에는 도내 각 진(鎭)의 위치와 산천의 형세, 노정(路程)의 원근, 성보(城堡)의 배치, 행군(行軍)의 절목(節目) 등이 자세하게 기술되었다. 그리고 각 진보(鎭堡)에서 일어났던 야인의 침범사건을 고사(故事)로 취급하고 있어, 전에 어떠한 사건이 있었던가를 밝히고 있다. 또 적침에 대비한 응변책(應變策)·봉수(烽燧)·복병(伏兵)·체탐(體探)·망해(望海) 등의 배치를 열거하고 향화야인(向化野人)부락의 위치와 추장·호수(戶數) 등도 부기하였다.

권2 끝 부분은 속록(續錄)의 형태로 국경 수비의 군무(軍務) 29조, 금령(禁令) 27조, 육진 군관의 관명(六鎭大分軍) 등을 수록하였다. 끝으로 이일의 ‘청행제승방략장(請行制勝方略狀)’과 이에 대한 조정의 회답인 ‘비국회관(備局回關)’, 그리고 ‘보순영(報巡營)’·‘방량식(放糧式)’과 이선의 발(跋)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조선 중기에 실시된 함경도 지역의 제승방략이라는 군사체제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고, 당시의 국경방어태세 및 군사제도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선조 때의 야인에 대처한 조선시대의 비변책(備邊策)은 물론 두만강 주변의 야인부락 사정도 잘 살필 수 있으며, 연산군 이래의 주요 고사도 알 수 있어 여진관계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 강성문, 『임진왜란 초기육전과 방어전술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 최창국, 「15~16세기 咸吉道 지역 軍事體制 "制勝方略" 연구」, 국방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 최창국, 「조선전기 북방 양계지역 ≪제승방략(制勝方略)≫의 실체와 현대적 함의」, 대한민국 육군, 2013.
  • 허선도, 「「制勝方略」 硏究」, 『진단학보』 제36호, 진단학회, 1973.
  • 허선도, 「壬辰倭亂에 대한 새로운 理解-制勝方略(防衛體制)를 中心으로-」, 대명고시연구회,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