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맹담(安孟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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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5년(태종 15)~1462년(세조 8) = 48세].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世宗)의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의 남편으로 부마(駙馬). 자는 덕수(德壽)이고,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함길도도관찰출척사(咸吉道都觀察黜陟使)와 함흥부윤(咸興府尹)을 지낸 가선대부(嘉善大夫)안망지(安望之)이고, 어머니 허씨(虛氏)는 봉상시(奉常寺)주부(主簿)허지신(虛之信)의 딸이다. 정의공주와의 혼인으로 1428년(세종 10)에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가, 이후 연창군(延昌君)을 걸쳐 연창위(延昌尉)로 개봉되었다.

세종~세조 시대의 활동

1415년 태어난 안맹담(安孟聃)은 14세가 되던 1428년(세종 10)에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혼인을 하였다. 당시 안맹담은 혼인을 위하여 죽성군으로 봉해졌다가, 1432년(세종 14) 연창군에 봉해졌다.[『세종실록(世宗實錄)』세종 10년 2월 12일] 1444년(세종 26)에는 관제를 개혁함에 따라 광덕대부(光德大夫)가 되었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종실(宗室)을 구별하기 위하여 부마를 군(君)이 아닌 위(尉)로 칭하라는 조정의 명에 따라 연창위로 개봉(改封)되었다.[『세종실록』세종 26년 7월 1일, 『문종실록(文宗實錄)』문종 즉위년 7월 19일]

안맹담과 정의공주가 종실로서의 삶을 영위하던 가운데 정의공주의 동생인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世祖))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서 실권을 장악하고, 이어 조카인 단종(端宗)으로부터 양위(讓位)를 받아 왕위에 오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맹담은 정난의 공이 있다 하여 1453년(단종 1) 성록대부(成祿大夫)에 가자(加資)되었으며, 1455년(세조 1년) 12월에는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1등으로 이름을 올렸다.[『단종실록(端宗實錄)』단종 1년 11월 8일, 『세조실록(世祖實錄)』세조 1년 12월 27일] 그러나 안맹담과 정의공주가 세조 즉위와 관련하여 특별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국가나 왕실의 안정에 공훈이 있는 정공신(正功臣) 외에도 공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원종공신을 주던 경우를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주로 아들과 사위 등이 그 대상자였고, 안맹담도 이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이어 안맹담은 1457년(세조 3)에 정1품 의빈(儀賓)에게 주던 최고 품계인 수록대부(綬祿大夫)에 올랐다.[『세조실록』세조 3년 4월 6일]

한편 안맹담과 정의공주의 셋째 아들인 안상계(安桑鷄)는 세조의 행보에 반대하여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저자도(楮子島)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 김종직(金宗直), 남효온(南孝溫) 등과 어울리며 세월을 보내다가 세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관직에 나섰다. 이렇듯 아들이 세조를 반대하는 입장이기는 하였으나, 세조가 틈틈이 정의공주의 집을 방문하고, 안맹담 역시 공신들이 세조와 노산군(魯山君 : 단종)에게 맹족(盟簇)을 바치던 연회를 비롯하여 이후 세조가 개최한 연회 등에 꾸준히 참석한 것으로 보아 세조와 안맹담의 관계가 나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세조실록』세조 1년 8월 16일] 그리하여 1462년(세조 8) 안맹담이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세조는 이틀간 철조(輟朝)를 명하기도 하였다.[『세조실록』세조 8년 12월 25일]

정의공주는 안맹담이 사망한 이후 그의 명복을 빌며 1469년(예종 1)에 『지장보살본원경(地裝菩薩本願經)』을 간행하였다. 조선 왕실의 불교 신앙에 대한 한 유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평가 받는 이 『지장보살본원경』은 1988년 12월 28일에 보물 제966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안맹담이 사망한 15년 후인 1477년(성종 8) 정의공주 또한 사망하였다.

성품과 일화

안맹담은 온량(溫良)하고 즐기기를 좋아하였으며, 자혜롭고 어버이를 사랑으로 섬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여 세종 대에 병이 나서 조알(朝謁)을 끊기도 하는 바람에 결국 세종이 연창위의 술친구들을 불러 연창위가 누구와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지 물었고, 이후 술친구들이 다시는 연창위와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세조실록』세조 8년 12월 25일]

다른 한편으로 안맹담은 불심(佛心)도 상당히 깊었던 까닭에 고사(古寺)를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문종실록』문종 1년 5월 5일] 이러한 불심과 관련하여 안맹담이 부귀롭게 생장하여 학술은 없으나, 불법(佛法)을 좋아하여 밥 먹이는 중이 항상 10여 명이나 되었으며, 중의 옷을 입고 중의 아랫자리에 앉아서 불경을 읽고 밥을 먹고, 살생(殺生)을 싫어하고 양잠(養蠶)도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문종실록』문종 2년 2월 2일] 이 외에도 안맹담은 초서(草書) 및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 하였고, 음률(音律)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약물(藥物)을 갖추어 놓고 다른 이에게 봉사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양효안공신도비(良孝安公神道碑)』]

묘소와 후손

안맹담의 시호는 양효(良孝)인데, 온량(溫良)하고 즐기기를 좋아한 것을 양(良)이라 하고, 자혜롭고 어버이를 사랑으로 섬긴 것을 효(孝)라 한다.[『세조실록』세조 8년 12월 25일] 묘소는 정의공주의 묘소 옆에 나란히 있는데,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3-1에 위치한다. 봉분 2개가 나란히 위치하였으며, 봉분 앞에 석등과 4기의 문인석이 남아 있다. 묘소 앞에 있는 신도비의 비문은 첫째 딸의 시아버지인 정인지(鄭麟趾)가 지었으며,[『양효안공신도비』] 글씨는 넷째 아들 안빈세(安貧世)가 썼다. 1982년 11월 13일에 정의공주의 묘소와 함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안맹담은 부인 정의공주와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안여달(安如獺)은 가선대부(嘉善大夫)돈녕부사(敦寧府使)를, 차남 안온천(安溫泉)은 조산대부(朝散大夫) 제용감(濟用監)부정(副正)을 각각 지냈다. 삼남 안상계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돈녕부(敦寧府)도정(都正)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사남 안빈세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 등을 역임하였다. 장녀는 세자좌익위(世子左翊衛)정광조(鄭光祖)에게 출가하였으며, 차녀는 통정대부 병조 참지(參知)한치례(韓致禮)에게 출가하였다.

한편 안맹담의 큰 아들과 셋째 아들의 이름은 세종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큰 아들은 물에서 노는 수달과 같이 활발하다 하여 여달이라 하였고, 셋째 아들은 뽕나무 밭의 닭처럼 쉴 새 없이 돌아다닌다고 하여 상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들은 이에 감격하여 이 아명(兒名)을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 사용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돈녕보첩(敦寧譜牒)』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양효안공신도비(良孝安公神道碑)』
  • 『조선왕조선원록(朝鮮王朝璿源錄)』
  • 『좌익원종공신녹권(左翼原從功臣錄券)』
  •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
  • 『지장보살본원경(地裝菩薩本願經)』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희락당고(希樂堂稿)』
  • 『두산백과』
  • 『민족문화대백과』
  • 경기도박물관, 『경기 묘제 석조 미술』, 경기도박물관, 2007.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실계보』, 지식하우스, 2008.
  • 지두환, 『세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
  • 송일기·진나영, 「『좌익원종공신녹권(左翼原從功臣錄券)』의 書誌的 硏究」, 『한국문헌정보학회지』42-4, 2008.
  • 이순자, 『조선의 숨겨진 궁가 이야기』, 평단,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