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한(沈之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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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6년(선조 29)∼1657년(효종 8) = 62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효종(孝宗)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와 호조 참의(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자장(子章)이고, 호는 창주(滄洲)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심탁(沈倬)이며, 어머니 음성 박씨(陰城朴氏)는 박유녕(朴有寧)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감찰(監察)을 지낸 심종범(沈宗範)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호군(護軍)을 지낸 심현(沈鉉)이다. 정엽(鄭曄)의 문인이기도 하다.

광해군~효종 시대의 활동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아버지 심탁과 함께 이를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1618년(광해군 10) 동학유생(東學儒生)으로 조경기(趙慶起) 등 8인과 함께 폐모론을 주도하는 이위경(李偉卿), 정조(鄭造), 윤인(尹認) 등을 극형에 처하도록 상소하였다가 아버지와 함께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79 「승지심공묘갈명(承旨沈公墓碣銘)」 이하 「심지한묘갈명」으로 약칭]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횡성 산골로 낙향하였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발생하면서 문외출송에서 풀려났다.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29년(인조 7)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학유(學諭)를 지냈으며, 뒤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0년 3월 12일, 『방목(榜目)』, 「심지한묘갈명」] 그 뒤 1634년(인조 12) 윤8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1635년(인조 13) 1월 조산대부(朝散大夫) 행(行) 병조 좌랑(佐郞)을 거쳐 조산대부 행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며, 그해 6월에는 홍문관(弘文館) 신록(新錄)에 선발되어 11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2년 윤8월 19일, 인조 13년 6월 4일, 인조 13년 11월 18일, 인조 14년 3월 22일, 『승정원일기』인조 13년 1월 3일, 인조 13년 1월 16일] 이어 1636년(인조 14) 3월에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가 홍문관 수찬(修撰)에 제수되는 등 두루 청요직(淸要職)을 거쳤다.[『인조실록』 14년 6월 7일]

한편 심지한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기 전에 청(淸)나라와 절교하고 자강책(自强策)을 강구하여 대비하자고 주장하였으나,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심지한묘갈명」] 이때 청군(淸軍)이 금강(錦江)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종사관(從事官)김광혁(金光赫)이 태인현(泰仁縣)으로 왔으나 고을이 텅 비어 있었다. 이에 김광혁이 현리(縣吏)를 찾아내어 형장을 가하자 심지한의 족속들이 김광혁에게 겁을 주어 쫓아내었는데, 병자호란이 끝난 후 이것이 문제가 되어 심지한은 국문에 처해졌다.[『인조실록』인조 15년 2월 26일] 이후 종묘령(宗廟令)을 거쳐 1640년(인조 18) 평창군수(平昌郡守)가 되었으나, 태인현감 때 병자호란 당시 명(明)나라 사신을 쫓아버렸다는 혐의를 입어 체직(遞職)되었다.[『인조실록』인조 18년 7월 17일] 이듬해인 1641년(인조 19)에는 병자호란으로 산실된 역사기록을 보충하기 위하여 겸춘추(兼春秋) 20명을 증원하였는데 심지한도 여기에 선발되었다.[『인조실록』인조 19년 7월 13일] 그리고 1647(인조 25)년부터 다시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와 홍문관 교리(校理), 홍문관 부수찬, 홍문관 수찬, 사헌부 헌납(獻納) 등을 거쳤다.[『인조실록』인조 25년 1월 25일, 인조 25년 6월 19일, 인조 26년 5월 19일, 인조 26년 9월 26일, 인조 26년 11월 14일]

1649년(효종 즉위년) 효종 즉위 후 심지한은 홍문관 교리와 사간원 사간(司諫), 홍문관 응교(應敎), 홍문관 부수찬, 홍문관 부교리,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집의(執義), 승정원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즉위년 6월 16일, 효종 즉위년 9월 25일, 효종 즉위년 10월 7일, 효종 즉위년 11월 8일, 효종 즉위년 11월 20일, 효종 즉위년 12월 5일, 효종 즉위년 12월 17일,효종 1년 1월 9일, 효종 3년 2월 14일, 효종 3년 4월 9일, 효종 3년 4월 16일, 효종 3년 6월 8일, 효종 3년 6월 20일, 효종 3년 7월 8일, 효종 3년 12월 22일] 이런 가운데 1653년(효종 4) 심지한은 홍처후(洪處厚)와 함께 『서경(書經)』의 「무일편(無逸篇)」과 『시경(詩經)』의 「칠월편(七月篇)」을 베껴 병풍으로 만들어 효종에게 바쳐 마장(馬裝) 1부(部)를 하사받았다.[『효종실록』효종 4년 2월 29일] 그리고 그해 3월 홍문관 응교를 거쳐 5월에는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효종실록』효종 4년 3월 6일, 효종 4년 5월 19일] 이후 호조 참의와 병조 참의, 공조 참의, 연안부사(延安府使) 등을 역임하다가 1657년(효종 8)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4권 2책의 시문집인 『창주집(滄洲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심지한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온화하고 후덕하며 침착하고 조용하였다. 남의 허물을 입에 담지 않았고, 일이 대의(大義)와 관련되었다면 격렬하게 발분하여 가까운 사람이라도 잘못을 덮어주는 일이 없었다. 고아가 된 두 동생의 어린 자식을 기르면서 은애(恩愛)를 다하였으며, 재산을 나눌 때는 부친의 뜻을 생각한 것이라고 하며 특별히 작은 누이에게 후하게 주었다. 조정에 나가서는 임금에게 한결같았으며,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아래로는 백성의 고통을 극언(極言)하였다.[「심지한묘갈명」]

한편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진다. 심지한이 『시경』과 『서경』, 『대학(大學)』, 『주례(周禮)』에서 핵심이 되는 말들을 취하여 병풍을 만들어 효종에게 올리자, 효종이 매우 칭찬하면서 벽에 펼쳐두고는 늘 살펴보면서 “이것으로 충분히 다스림을 삼을 수 있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호피 한 장을 내리자, 심지한이 감동하여 여강(驪江)가에다 정자를 지으면서 「일호(一虎)」라는 편액을 쓰고자 하였다고 한다.[「심지한묘갈명」]

묘소와 후손

심지한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에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찬하고 권상하(權尙夏)가 글을 썼다. 원래 묘소는 광주 선영에 있었으나 이후 용인으로 옮겼다.[「심지한묘갈명」]

부인은 둘이었는데, 첫째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와의 사이에서는 1남 2녀를 두었다. 1남은 봉사(奉事)를 지낸 심재(沈材)이고, 1녀는 지평(持平)이백린(李伯麟), 2녀는 이희상(李喜相)과 각각 혼인하였다. 둘째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와의 사이에서는 4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심계(沈枅), 심제(沈梯), 심해(沈楷), 심최(沈樶)이고, 딸은 임굉유(林宏儒), 이공화(李公華), 임철(林澈)과 각각 혼인하였다. 또 측실(側室)이었던 이씨(李氏)와의 사이에서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심기(沈機), 심려(沈欐), 심의(沈檥)이고, 딸은 유정(柳精), 이두삼(李斗三)과 각각 혼인하였다.[「심지한묘갈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