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연(宋光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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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8년(인조16)∼1695년(숙종21) = 58세]. 조선 후기 효종~숙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도심(道深), 호는 범허정(泛虛亭)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좌승지송시철(宋時喆)이고,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는 파주목사(坡州牧使)정지경(鄭之經)의 딸이다. 좌의정송인명(宋寅明)의 조부이고, 예조 판서이정영(李正英)의 사위다.

남인 집권 시기 은둔

1666년(현종7) 문과(文科)별시(別試)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注書)에 보임되었다. 문필(文筆)이 뛰어나서 여러 번 시강원 설서(說書)에 의망(擬望)되었고, 마침내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1671년(현종12)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에 전직되었다. 이때 과거의 별과(別科)가 남잡(濫雜)하여 영의정허적(許積)의 얼자(孽子)가 급제하였으므로 송광연이 발론(發論)하여 창방(唱榜) 전체를 파기할 것을 청하다가, 상신(相臣)의 미움을 사서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그가 병이 심하여 부임하기가 어렵다고 핑계하고 부임하지 않자, 파직되어 출척(黜斥)당하였다. 마침 부모의 상을 거듭 당하여 5년간 상복을 입고 거의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는 서인(西人)이었으므로, 남인(南人)허적이 집권하던 시기에 벼슬길에 감히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1675년(숙종1) 부모의 복상(服喪)을 끝마친 후, 병이 점점 깊어져서 때로는 여러 날을 초초하고 불안하게 보내자 온 가족과 함께 강릉(江陵)의 학담(鶴潭)으로 이사하여 휴양하였다. 그러나 병의 증세가 더욱 악화되는 바람에 훌륭한 의원을 찾아 서울로 다시 돌아와서 고양(高陽)의 행호(杏湖)에 경치 좋은 장소를 골라서 집을 짓고, 정자에 ‘범허정(泛虛亭)’이라는 편액(扁額)을 걸어 놓고 글을 읽고 한가롭게 휴양하였다. 병이 조금 나아졌을 무렵, 1678년(숙종4)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임명되었는데, 세 번 사양하다가 부임하였다. 그때 아전들을 매우 엄격하게 단속하는 등 치적이 많았다.

서인 집권 시기 활동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서 영의정허적이 죽고 남인들이 조정에서 몰려나자, 그는 제일 먼저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홍문관에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 <경신대출척> 이후 관학(館學)에서 8도의 유생(儒生)들을 거느리고 문성공(文成公)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거듭 청하였고 경연(經筵)의 자리에서도 힘써 건의하니 숙종이 예조로 하여금 이를 거행하게 하였다. 당시 서인들은 그를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칭송하였다.

1681년(숙종6)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고 부응교(副應敎) · 부교리(副校理)로 차례로 승진되었으며, 그 사이 사헌부 집의(執義) · 사간원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묘당(廟堂)에서 추천하여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나갔다가, 다시 예조 참의가 되었다. 1682년(숙종8)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병조 참지에 임명되었다. 숙종이 특별히 승지(承旨)로 발탁하여 2년 정도 재임하였으나, 1684년(숙종10) 동부승지(同副承旨)에서 해직되었다. 숙종의 문책(問責)을 당한 뒤에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나갔고 1689년(숙종15)에는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나갔는데, 절도사(節度使)와 뜻이 맞지 않아서, “주수(主帥)를 능멸하였다.”는 죄목으로 귀양갔다가 얼마 뒤에 석방되었다. 1694년(숙종20)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왕비로 복위되자, 서인이 집권하고 남아 있던 남인마저 모조리 쫓겨나는 이른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면서 형조 참의에 기용되었다. 조정의 대신들이 희빈장씨(禧嬪張氏)를 별궁(別宮)안치(安置)할 것을 상소하려고 하자, 그는 희빈장씨를 당장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여러 대신들을 놀라게 만들었으나, 서인(西人) 중에 젊은 과격파들은 그 말을 옳다고 지지하였다. 1694년(숙종 20)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승진되었고,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며, 호서순무사(湖西巡撫使)로 나갔다가, 형조 참판으로 전직되었다. 1695년(숙종21) 6월 9일 병으로 갑자기 죽으니, 향년이 58세였다.

저서로는 『범허정집(泛虛亭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송광연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용모가 비대하고 풍채가 장중하여 천박하지 않았으며 성질이 순실(淳實)하고 기량이 크고 넓었다. 항상 평온하고 조용하며, 관대한 도량과 굳고 확실한 지조(志操)가 있어서 진취(進取)에 급급하지 않았다. 나라를 다스릴 만한 그릇이라는 명망을 지녀 여러 번 판서에 추천되었으나, 숙종의 뜻을 거슬러 참판에 머물고 말았다. 학문으로는 명성과 실적이 성대하게 드러났으므로 경사(卿士)들이 모두 ‘현대부(賢大夫)’라고 칭송하였다.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안타깝게 여겼다.

평생에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여겨서, 항상 벼슬에 임명하는 명이 있으면 굳이 사양하다가 그 다음에 마지못하여 부임하였고, 물러날 때에는 하루를 기다리지 않고 당장 그만두었다. 정사(政事)를 시행할 적에는 나라의 법도를 제시하여 합리적으로 조리 있게 처리하였다. 옥송(獄訟)을 판결할 때에는 분명하게 따져서 과감하게 판결하여 정체되는 일이 없었다. 사안(事案)에 따라 일을 정돈하여 폐단을 제거하면서, 흔들리지 않고 정사를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1678년(숙종4) 순창군수(淳昌郡守)로 부임하였을 때 그 고을 안에 있는 절에 요사스런 중이 있었는데, 서울의 재상(宰相) 집에 출입하면서 그 세력을 믿고 고을 안에서 함부로 행동하면서 횡포를 부렸다, 그가 그 중을 잡아다가 옥(獄)에 가두고 심문하다가 형장(刑杖)으로 때려서 죽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황해도 장단(長湍) 백암교(白岩橋)의 언덕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그의 친구 영의정최석정(崔錫鼎)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명곡집(明谷集)』 권22)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예조 판서이정영(李正英)의 딸인데, 자식이 없어서 송징오(宋徵五)를 양자로 삼았다. 손자 송인명(宋寅明)은 좌의정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명곡집(明谷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서계집(西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典)』
  • 『한수재집(寒水齎集)』
  • 『백헌집(白軒集)』
  • 『외재집(畏齋集)』
  • 『월주집(月洲集)』
  • 『문곡집(文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