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경(鄭之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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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6년(선조 19)∼1634년(인조 12) = 49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문신.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와 파주목사(坡州牧使) 등을 지냈고, 예조 참판(参判)에 추증되었다. 자는 상백(常伯)이고, 호는 기은(機隠)이다. 본관은 동래(東莱)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호조 참판에 추증된 정근(鄭謹)이고, 어머니 문화유씨(文化柳氏)는 참판에 증직된 유수훈(柳秀薫)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된 정희등(鄭希登)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종부시(宗簿寺)첨정(僉正)을 지낸 정구(鄭球)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 1)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여, 음직(蔭職)으로 재랑(斎郎)에 임명되었다가 사복시(司僕寺)주부(主簿)로 승진하였다.[『약헌집(約軒集)』 권13 「파주목사증례조참판정공묘표음기(坡州牧使贈禮曹參判鄭公墓表陰記)」 이하 「정지경묘표」로 약칭] 1616년(광해군 8)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방목(榜目)』] 과거에 급제한 뒤에 참하관의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자원하여 남평현감(南平県監)에 임명되었다.[「정지경묘표」] 1617년(광해군 9) 11월 의정부(議政府)에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문제에 대한 상소를 논의할 때, 그는 호조 좌랑(佐郞)으로서 말단 관직에 있는 자가 감히 함부로 의논드릴 일이 아니라며 참여하지 않았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9년 11월 25일]

1620년(광해군 12) 배천현감(白川縣監)으로서 고을을 잘 다스린 공적을 인정받아 가자(加資)되어,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12년 1월 18일,「정지경묘표」] 이듬해인 1621년(광해군 13) 황해도의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3년 8월 7일]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사간원(司諫院)에서 “연안부사정지경(鄭之經)은 본래 추잡하고 비루한 인물로서 권문(權門)에 아부하며 살아 왔습니다. 전후 가자된 것도 모두 뇌물을 쓴 결과인데, 가는 곳마다 수탈을 일삼으면서 한도가 없었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하였다. 인조가 이를 따라, 정지경을 사판에서 삭제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년 4월 2일,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4월」] 1624년(인조 2)에 부친상을 당하였다.[「정지경묘표」]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자,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 가는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가, 서울로 돌아와서 중추부 첨지사에 임명되어 오위장(五衛将)을 겸임하였다.[「정지경묘표」] 1628년(인조 6) 천안군수(天安郡守)로 임명되었는데, 이듬해인 1629년(인조 7)에 고을을 잘 다스렸다고 하여 상을 받았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6년 1월 30일, 인조 7년 3월 22일, 「정지경묘표」] 1629년(인조 7) 4월 상언(上言)하는 절차를 어기고 ‘계자(啓字)’ 인장을 도용한 죄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서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인조의 특명으로 내관 백대규(白大珪)와 함께 곤장을 맞고 파직되었다.[『인조실록』인조 7년 4월 26일]

1630년(인조 8) 8월 문안사(問安使)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윤지(尹墀)가 아뢰기를, “당초 비변사의 계사(啓辭)에 문안사를 차송하겠다고 하였으므로 당상관 정지경을 차출한 것입니다.” 하니, 인조가 알았다고 전교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8년 8월 18일] 1632년(인조 10) 파주목사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 사판에서도 삭제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10년 3월 24일, 인조 10년 8월 4일, 인조 10년 8월 14일 「정지경묘표」] 당시 사간원에서는 “파주목사정지경은 거칠고 교활하며 탐욕스럽고 혼탁하여 부임한 뒤에 거둬들이는 것이 법도가 없어 백성들이 명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으니, 파직하소서.”라고 탄핵하였던 것이다. 그 뒤에 정지경의 아들 전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정식(鄭栻)이 상소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하였다. 그러나 사간원과 사헌부(司憲府)에서 정지경이 아들 정식을 이용한 것이라고 탄핵하였으므로 기각되었다.[『인조실록』인조 10년 8월 3일, 『응천일록(凝川日錄)』 권6]

1634년(인조 12) 8월 초1일에 나쁜 역질[末疾]에 걸려 본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49세였다. 일찍이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従功臣)에 참여하였으므로 관례에 따라 예조 참판을 증직(贈職)하였다.[「정지경묘표」]

상언(上言)의 절차를 어긴 정지경

상언(上言)’은 관리나 백성이 자기 일신상의 문제를 임금에게 아뢰는 것을 말하고, ‘상서’는 글로써 올리는 것을 말하는데, 상언도 임금에게 직접 만나서 아뢰는 것이 아니라 글로써 아뢰는 것이다. ‘상소(上訴)’는 대간(臺諫)에서 정책적인 문제를 아뢰는 것을 말하고, ‘상서’는 일신상의 문제보다 큰 문제를 아뢰는 것을 말하며, ‘상언’은 일신상의 작은 문제를 아뢰는 것을 말한다. 백성들이 임금에게 상언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먼저 억울한 사연을 글로 쓰서 승전색(承傳色)에 접수하면, 승전색 나인(內人)이 담당 승지[色承旨]에게 전달하여 승지가 그 내용을 읽어보고 임금에게 아뢸 만한 상언이니 상서(上書)에다 ‘계자(啓字)’의 인장을 찍어서 승전색 나인이 임금에게 가져다가 바치고, 임금이 읽어보고 말로써 대답하면, 나인이 그 말을 듣고 전달하는데, 이것을 ‘승전색 구전(口傳) 하교(下敎)’라고 한다. 우승지(右承旨)가 예방(禮房) 승지이기 때문에 ‘어보(御寶)’와 함께 ‘계자(啓字) 인장(印章)’을 보관하였다.

정지경은 뇌물을 먹었다고 파직당하자, 자기 어머니 유씨(柳氏)의 이름으로 억울한 사정을 상언하였다. 그런데 담당 승지기 읽어보고 임금에게 전달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계자의 인장을 찍지 않았다. 그러자 정지경은 승전색 나인 백대규에게 뇌물을 주고 자기 어머니 유씨의 상언을 다른 사람의 상서 두루마리 속에 끼워 넣어서 몰래 계자를 찍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담당 승지에게 발각이 되면서 상언의 절차를 어긴 죄와 또 인장을 도용한 죄에 적용되어 정지경과 백대규는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이후 백대규가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 두 사람은 모두 극형을 받게 되었다.[『인조실록』인조 7년 4월, 『승정원일기』인조 7년 4월 23일, 인조 7년 4월 26일, 인조 7년 윤4월 11일]

그러나 인조가 “죄를 범한 것이 중대하여 자복(自服)하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보통 억울함을 호소하고, 감히 혐의가 있는 사람을 오로지 공격하여 자기 한 몸만 빠져나가려는 계책으로 삼는다. 그 정상이 매우 추악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교한 죄상을 적발하고 추문(推問)하는 것이다. 그 마음을 따져 보면 식견이 낮고 제 편할 대로만 하려는 뜻에 불과하다. 그러니 지금 만약 형신(刑訊)한다면 이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니, 그의 초심을 헤아려 가벼운 벌을 시행하는 편이 훨씬 낫다. 나의 뜻이 이러하니, 본부(本府)는 다시 더 헤아려 의논해서 처리하라.” 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7년 윤 4월 21일] 이러한 인조의 특명으로 조정 대신들의 반복되는 탄핵에도 불구하고 백대규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곤장을 맞았으며, 정지경도 죽을 죄를 면하고 곤장을 맞고 파직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7년 윤4월 17일, 인조 7년 윤4월 18일, 인조 7년 윤4월 19일] 이것은 인조가 평소에 백대규를 아꼈던 덕분이기도 하였다.[『인조실록』인조 7년 4월 26일]

성품과 일화

정지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타고난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효성이 순수하고, 우애가 독실하였다. 세력이나 이익에 욕심이 없었으므로, 요로(要路)에 있는 사람과 거의 왕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좋은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였고, 남들의 비난을 많이 받았다. 부임한 고을에서 인자함과 너그러움으로 다스렸으므로, 그가 떠난 뒤에는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頌徳碑)를 세워서, 그 덕을 칭송한 곳이 많다고 하였다.[「정지경묘표」]

그러나 이와 달리 거칠고 교활하며 탐욕스럽고 혼탁하여 수령으로 부임한 뒤에 거둬들이는 것이 법도가 없어 백성들이 명을 감당해 내지 못하였다는 평가도 있다.[『인조실록』인조 10년 8월 3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 있는데, 송징은(宋徴殷)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정지경묘표」]

부인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우참찬(右参賛)을 지낸 진흥군(晉興君)강신(姜紳)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인 정식은 의금부 도사를 지냈는데, 그보다 앞서 요절하였다. 장녀는 사인(士人) 유기선(柳基善)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승정원 승지송시철(宋時喆)의 처가 되었다. 서자(庶子) 정익(鄭杙)이 있다.[「정지경묘표」]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명재유고(明齋遺稿)』
  • 『약헌집(約軒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포저집(浦渚集)』
  • 『모재집(慕齋集)』
  • 『기암집(畸庵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매산집(梅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