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왜변(三浦倭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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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년 삼포(三浦)에서 일본 거류민인 항거왜인들이 일으킨 폭동.

개설

삼포왜변(三浦倭變)은 1443년(세종 25) 계해약조 이래 누적된 모순이 폭발한 것으로 1510년(중종 5) 4월 4일 삼포의 항거왜인들이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폭동이었다. 삼포왜란 또는 경오왜변이라고도 하였다. 삼포왜변의 기본적인 원인은 성종대 대일 통교 체제의 정비책에 따른 조선 조정의 긴축정책과 이후 중종 초기까지 강화된 통제 정책이었다. 폭동은 15일 만에 진압되었지만 삼포 항거왜인(恒居倭人)과 대마도주가 합세한 세력과 조정의 진압군의 규모로 볼 때 전쟁에 버금가는 폭동 사건이었다. 그만큼 전란의 피해는 컸으며, 그 후 조일 관계에 미치는 영향도 매우 심각하였다.

삼포왜변으로 조정은 대마도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였고, 삼포를 폐쇄하였으며, 항거왜인들을 모두 추방하였다. 일본실정막부(室町幕府)의 요청으로 2년 후 임신약조를 체결함으로써 통교 재개를 허락하였지만, 조정의 강경한 입장이 반영되어 이전의 계해약조에 비하여 그 내용이 대폭적으로 제한되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삼포왜변은 조선초기의 대일 통교 질서가 허물어지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역사적 배경

1510년에 일어난 삼포왜변은 일본의 국내 경제 발전에 따른 무역 확대 요구에 조선이 축소 지향 정책을 펴면서 충돌하였다. 직접적인 요인은 성종대 이래 엄격한 교역 통제책과 연산군대 운영상의 모순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만 표출이었다. 조정에서는 왜인들의 법규 위반과 침략 행위에 대한 규제 논의도 있었으나 미봉책으로 대응하였다.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조선 정부가 펼친 대일 정책의 일관성과 엄격성의 결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초기 왜구 금지를 위하여 통교자들에게 하사품을 후하게 주다가 뒤이은 긴축과 통제 정책의 시행은 일본 측 통교자들의 불만을 샀다. 그러나 일단 약조를 맺었으면 규정대로 엄격하게 시행해야 했는데, 왜구 재발에 대한 의구심, 상국(上國)으로서의 대의명분과 관용 등이 섞여 1419년(세종 1)의 기해동정(己亥東征)을 제외하고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미봉책과 회유책으로 일관하였다. 이것이 통교왜인들의 버릇을 나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삼포왜변을 부르게 되었다.

부수적인 요인으로는 삼포 항거왜인들의 기동성과 무력을 겸비한 조직을 들 수 있다. 삼포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실태를 보면, 1407년(태종 7) 포소를 개항하여 항거왜인의 거주를 허락한 이래 세종 초기에는 삼포 항거왜인을 모두 60호(戶)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항거왜인의 수는 이후에도 급속도로 증가하여 세조과 성종대에는 400호를 넘었다.

조선 조정은 주기적으로 송환을 하였으나 줄지 않고 계속 늘어나자 결국 왜리(倭里)라는 집단 거류지를 설정하여 살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삼포 항거왜인은 각 포소마다 추장이 있고, 그 위에 수직인(受職人)인 삼포총치자(三浦總治者)가 총책임자로 통제하는 행정적인 조직망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 조정으로부터는 면세 혜택을 받은 대신, 조직을 통하여 세금을 징수해 대마도로 보내는 등 대마도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결국 삼포왜변을 일으켰는데, 거기에는 대마도의 조종과 삼포 항거왜인들의 조직력과 기동성이 발휘되었다.

발단

직접적인 요인은 성종대 이래 엄격한 교역 통제책과 연산군대 운영상의 모순에 대한 일본인, 특히 대마도인들의 불만이었다. 즉, 연산군의 실정(失政)에 의하여 조선 정부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자 통교왜인에 대한 접대가 부실해졌고, 이와 함께 변방을 지키는 관리들의 횡포와 접대 위반 사례가 빈발하자 왜인들의 불만이 높아졌던 것이다. 이에 따라 연산군대에 이미 왜선(倭船)의 해적 행위와 삼포 항거왜인에 의한 방화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1506년(중종 1) 조정은 통교와 접대를 계해약조대로 환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재정 상태 악화와 접대 비용 과다로 인하여 4년 후에는 다시 긴축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조선 조정의 엄격한 통제에 따라 통교왜인들의 저항도 거세게 나타나 1474(성종 5)에서 1509(중종 4) 사이에 왜구에 의한 약탈이 12회나 있을 정도였다.

왜변이 발발한 원인에 대하여 조선 조정과 대마도의 주장은 사뭇 달랐다. 1505년(연산군 11) 당시 왜인 접대 비용[倭料]이 제포 700석과 부산포 500석이었는데, 이는 재정에 큰 부담이었다. 또 조정에서는 왜인의 위반과 횡포가 심하고, 재정 긴박, 치안과 기밀 누설 위험 등으로 통제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비하여 대마도주가 예조에 보낸 서계를 보면, ①전대의 도주인 소 종정성(宗貞盛) 이래 우호를 맺고 매년 세견선을 보냈는데 위약(違約)이 많고 ②세견선에 대하여 양료(糧料)를 지급하지 않고, 정해진 규칙대로 접대하지 않으며 ③그 사실을 중앙에 알리려고 해도 변장(邊將)이 방해한다는 등을 거병 이유로 내세웠다. 직접적 원인으로는 “부산첨사 등 삼포의 진장들이 항거왜인에게 심한 사역을 시키고 접대를 제대로 하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마도주가 병선 수백 척을 부산포 등지에 보내 변장과 싸우게 하였다고 하였다.

경과

삼포왜변은 1510년 4월 4일 제포의 항거왜추(恒居倭酋)인 대조마도(大趙馬道: 奴古守長)와 대마도의 대관(代官) 소 종성친(宗盛親)이 중심이 되어 군사 4,000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수군 근거지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대마도주는 사전에 이들과 논의하였고 병선 수백 척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래서 폭동을 일으킨 집단은 기존의 항거왜인에 대마도인 4,500명이 합세하여 대규모의 인원과 선단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웅천성(熊川城)을 포위하여 분탕질을 하였고, 이와 동시에 부산포와 염포에서도 합세하여 난을 일으켰다.

조선 정부에서는 곧 5,000여 명의 진압군을 보내어 대응하였다. 이에 왜인들은 부산첨사이우증(李友曾)을 살해한 뒤 각 포소의 선박을 모두 불태우고 철수하였다. 한편 대마도주는 요구 조건을 내걸고 화호(和好)를 요청하였다. 폭동 진압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거제도 해전이었다. 조선의 수군은 거제도에서 적선 1,000척을 맞아 격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육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삼포왜변은 15일 만에 진압되었다. 그런데 전투 결과 조선 측 피살자가 272명에 이르고 민가 800여 채가 불탔으며, 일본 측은 대선 5척이 침몰하고 100여 척이 파손되었으며 300여 명이 참살되는 등 대규모의 폭동 사건이었다.

삼포왜변이 발발하자 조선 정부는 즉시 대마도와의 통교를 중단하였다. 난이 진압된 지 1년 후 막부 측에서 국왕사 붕중(棚中)을 파견하여 강화안을 제시하며 대마도와의 통교 재개[許和]를 요청하였다. 조정의 논의에서는 대일 통교 단절[絶和]이라는 강경론도 나왔으나 결국 조건부로 화의 제의에 응하였다. 한편 붕중을 매개로 한 강화 교섭 중 대마도주가 주모자의 목을 베어 바칠 것, 피로인을 송환할 것 등 조선의 요구 조건을 이행하자 조선은 삼포왜변 2년 후인 1512년(중종 7) 임신약조를 체결하여 교역의 재개를 허락하였다.

9개조로 구성된 임신약조의 내용은 ①삼포에서의 왜인 거주 불허 ②대마도주 세견선을 50척에서 25척으로 반감 ③대마도주 세사미두를 200석에서 100석으로 반감 ④대마도주 특송선 폐지 ⑤대마도주 일족과 수직인·수도서인의 세견선·세사미두 폐지 ⑥대마도주 파견 이외의 사송선은 적왜(敵倭)로 간주해 처단 ⑦일본 본주(本州)의 수직인·수도서인 정리 ⑧포소와 해로(海路)의 제한 ⑨국왕사를 제외한 상경 왜인의 무기 휴대 금지 등이었다.

삼포왜변 전에 비하여 대폭적인 제한을 가한 것으로 경제적 요소와 질서 유지라는 측면에서 조선 조정의 강경한 입장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신약조 이후 일본의 세견선 파견 수는 삼포왜변 이전 210척에서 60척으로 줄어들었다. 그만큼 통제가 엄격해지고 교역 규모가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조약으로 조선 측의 접대 비용이 경감되고 왜인들의 무역 이익이 감소되었지만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의의

삼포왜변은 1443년 계해약조 이후 지속되었던 조선초기 이래의 대일 통교 체제의 모순이 폭발한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일본 및 대마도와의 역사적·지리적 관계의 고려와 북방 야인(野人)들의 움직임에 대한 우려 때문에 통교 단절은 하지 않았지만 삼포왜변은 조선초기의 대일 통교 질서가 허물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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