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부료군관(別付料軍官)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후기 평안도·함경도 지방 출신 무사들을 우대하기 위해 총융청과 용호영에 두었던 군관.

개설

숙종대 평안도 및 함경도 지방을 배려하기 위해 이 지역의 무사들이 중앙의 무관으로 보다 용이하게 진출할 수 있도록 용호영(龍虎營)과 총융청(總戎廳)에 별부료군관을 설치하였다. 기존의 국가 경상비가 아닌 별도의 경비로 이들에게 급료를 지급하였으므로 서북별부료군관(西北別付料軍官)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숙종대 청천강 이북[淸北] 압록강 변의 군현과 함경도 6진의 무사를 별부료군관으로 선발하고 이들에게 급료 지급 등을 위한 제도로서 별부료청(別付料廳)을 두었다.

경종대에는 내지(內地), 즉 평안도의 청천강 이남과 함경도의 남관(南關) 무사들도 별부료군관을 통해 중앙에 진출할 수 있도록 대상 자격을 넓혔다. 1760년(영조 36)에는 평안도와 함경도에 정원을 각각 40명으로 늘리고 운영 방식을 새로이 정하였다. 그리고 별부료군관을 용호영에 속하게 하는 골격도 이때 마련되어 이후로 계속되었다.

용호영에는 서북별부료군관 80명이 일반 금군보다 상위에 있는 정원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서북별부료군관에 결원이 생기면 각 고을에서 선발하여 그 도의 병영이나 감영에서 중앙으로 올려 보냈다. 이들을 상대로 병조(兵曹)에서 별부료시사(別付料試射)를 치러 정원을 채웠다. 최초에는 금군청(禁軍廳)에 소속되었으나 1755년 금군청이 용호영으로 개칭되면서 용호영 소속으로 되었다. 한편 총융청에도 별부료군관 두 자리가 있었으나 서북 지방과의 관련은 없었다.

서북별부료군관으로 진출한 서북 지역의 무사들은 시사(試射)를 통해 무과 전시(殿試)에 곧바로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거나 변장(邊將)은 물론 수령으로 등용되었다. 별부료군관은 매년 3월 왕의 재가를 얻어 시사를 치렀는데 이때 관북, 남관, 청북, 청남의 4청(廳)에서 각각 수석한 사람은 한량(閑良)이면 전시에 곧바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고, 무과 출신이면 가자(加資)하거나 변장에 임명하였다. 정규적인 시사 이외에도 왕이 융무당(隆武堂) 등에 나아가 별부료군관에게 시사하여 가자하거나 급제를 내리기도 하였다(『영조실록』49년 윤3월 24일). 또한 구근(久勤)의 자격을 갖춘 별부료군관은 1년에 두 차례 있는 도목정사 때마다 관북과 청북 각 한 명, 남관과 청남은 합하여 한 명을 변장으로 임명하였다.

담당 직무

서북별부료군관은 금군(禁軍)으로서 왕을 호위하고 궁궐의 시위를 담당하였다.

변천

1760년에 서북별부료청을 일시 혁파하고 별부료군관 제도를 없애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관직을 얻기 위해 단신으로 한성에 올라와 몇 년씩 머무르며 지내는 서북 무사들이 적지 않아 이들의 관직 진출로를 다시 열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서북별부료군관의 혁파를 취소하고 다시 운영하였다.

평안도의 청천강 이남과 함경도 남관의 무사들이 서북별부료군관에 참여하는 제도는 경종대 이후 어느 때인가 한동안 폐지되었다가 1789년(정조 13) 윤5월에 이 지역 무사를 별부료군관으로 등용하는 제도가 복구되고, 아울러 별부료군관의 정원을 증액하였다. 이에 따라 청남과 남관에 별부료군관을 각 20명씩 등용하였는데, 출신(出身)이 10명, 한량이 10명씩이었다(『정조실록』13년 윤5월 22일). 이에 따라 용호영에 속한 별부료군관은 120명이 되었다. 이 조치는 평상시 이 지역에 무예를 권장하고, 인물을 미리 뽑아 두어 위급할 때 활용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19세기 초 『만기요람』에 의하면 별부료군관 중 매월 병방(兵房)에서 청천강 이북과 관북에서 각각 10명씩, 청천강 이남과 남관에서 각각 5명씩 모두 30명을 뽑아 부료군관(付料軍官)으로 채용하기도 하였다.

시사를 치러 별부료군관을 등용하는 제도가 완전히 폐지된 시기는 파악하기 어려우나 대체로 1880년대 후반까지 제도가 시행된 것으로 보아 1890년대 중반 근대식 군제의 도입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와 북방 영토 의식』, 경세원, 2000.
  • 오수창, 『조선 후기 평안도 사회 발전 연구』, 일조각, 200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