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白蓮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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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때 숙종과 영조의 어진을 잠시 모셨던 강화도 소재의 절.

개설

백련사(白蓮寺)와 관련한 기록은 19세기 이후에 보인다. 19세기 초에 염불삼매를 수행했던 의해당처활의 사리비가 건립되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에는 장녕전에 보관되어 있던 숙종과 영조의 어진(御眞)을 프랑스군의 침략을 피하여 잠시 백련사에 보관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벽담대규가 불화를 새로 조성하였으며, 20세기 초에는 인암 화상이 전각을 중건하였다.

내용 및 변천

(1) 창건

강화도고려산에 있는 백련사는 416년(고구려 장수왕 4)에 인도에서 하늘로 날아 온 승려가 다섯 연못과 다섯 연꽃이 영롱하게 빛나고 또 주변에 기암괴석과 푸른 소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 절을 창건하여 백련사라고 이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하지만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백련사에 대한 기록은 19세기 이후이다.

(2) 조선시대

1806년(순조 6) 3월에 의해당(義海堂)처활(處活)의 사리비(舍利碑)와 부도가 건립되었다. 그 사리비에 의하면 의해당은 20세에 출가하여 양헌(良憲) 선사에게 삭발하고 천봉(天峰) 대선사에게 수학하였으며 염불삼매 수행을 하였다. 60세에 병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제자들을 불러서 "나는 이제 떠날 것이다. 몸을 씻기고 깨끗한 옷을 입혀 달라. 내가 입멸하더라도 아무런 냄새가 없을 것이고 신비한 이적이 나타날 것이다."라 말하고 자리에 앉아서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를 하니 사리가 나왔다.

1866년(고종 3)에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병인양요가 발생하자, 강화장녕전(長寧殿)에 모셔 두었던 숙종과 영조의 두 어진(御眞)을 백련사에 옮겼다가(『고종실록』 3년 9월 8일), 그 다음날 곧바로 강화의 보(堡) 중 하나인 인화보(寅火堡) 진사(鎭舍)로 옮겨서 모셨다(『고종실록』 3년 9월 9일). 장녕전은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모두 불탔다.

1881년(고종 18)에 벽담대규(碧潭大奎)가 죽은 자의 심판을 주관하는 염라대왕상을 그린 현왕도(現王圖)를 조성하였다. 긍율(肯律)이 그린 이 불화는 가로 75.5㎝, 세로 79.5㎝ 크기이며 중앙에 현왕이 그려져 있고 좌우에 판관과 사자가 배치되어 있다. 또 벽담대규는 1888년(고종 25)에 지장보살도·신중도·칠성도·독성도 등을 조성하였는데 지금까지 전해온다.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는 가로 178.5㎝, 세로 141.5㎝ 크기이며, 신중도(神衆圖)는 가로 221㎝, 세로 145㎝ 크기이다. 신중도는 환경우인(幻鏡雨仁)이 증명법사가 되어 니봉중린(尼峰仲璘)과 혜산축연(蕙山竺衍) 등이 그렸다.

1905년(광무 9)에는 인암(忍庵) 화상이 화주승(化主僧)박보월(朴寶月)의 도움으로 사찰을 중건하였다. 그 중건기에 의하면, 인암 화상이 전각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2,000금을 내고 또 거주하는 승려들이 모연(募緣)하여 10,000금 이상을 모아서 2월 28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3월 17일에 상량하고 7월 30일에 완공하였다. 그리고 승려 박보월이 1908년(융희 2)에 불상을 개금하고 탱화를 봉행하였으며 1916년에 범종을 구입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 극락전과 삼성각, 칠성각, 범종각, 요사 등이 있는데, 극락전은 1905년에 인암 화상이 중건할 때 지어진 것이고 그 법당 안에 있는 후불탱화는 박보월이 1908년에 봉안한 것이다.

참고문헌

  • 사찰문화연구원 편저, 『인천·경기도의 전통사찰 Ⅱ』, 사찰문화연구원 출판국, 1995.
  • 韓國學文獻硏究所 편, 『傳燈本末寺誌』, 亞世亞文化社,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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