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화보(寅火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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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기도 강화부의 인화(寅火)에 설치한 진.

개설

인화보는 강화도호부 북쪽에 있다. 바다 건너서 교동의 해양 방비 상태를 살필 수 있었다. 숙종대에 만호(萬戶)를 설치했다가 고종대 권관(權管)으로 고쳤다.

위치 및 용도

인화보는 강화부 북쪽에 있던 방어시설이다. 정포(井浦)에서 인화·철곶이[鐵串]를 거쳐 승천보(昇天堡) 서쪽에 이르기까지 교동(喬桐)의 해로를 방비하였다. 인화보에서 조수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교동의 해안 방비 상태를 살필 수 있다. 승천보에서 인화석진까지는 강의 입구가 광활해서 주사를 쓸 수 있으며 적이 침범하기 어려웠다.

변천 및 현황

1679년(숙종 5) 종4품의 무관직인 만호를 설치했다. 인화보의 권관과 만호는 강화도호부의 수장이 자의로 관원을 추천하여 임명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문무와 잡과에 합격한 자인 출신(出身) 중에서 활쏘기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자들을 임용하였다(『숙종실록』 5년 7월 25일). 1867년(고종 4) 1월 인화보만호 자리를 종9품의 무관직인 권관으로 고쳐서, 처음 벼슬살이를 시작하는 자가 맡도록 하였다(『고종실록』 4년 1월 25일).

형태

돌로 쌓은 보루이며, 강화를 왕래하는 나룻배가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66년(고종 3) 7월 이양선(異樣船) 한 척이 인화보를 통과하여 월곶진 앞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다. 그들은 영국 상인이라고 하면서 통상 교역을 요구하고 서울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고종실록』 3년 7월 12일). 그해 9월에는 서양 외적들이 강화부 성으로 침입하여 들어왔는데, 그중 배 한 척이 갑곶진의 큰길을 따라 곧바로 남쪽 문으로 향하더니 개미떼처럼 성을 기어 넘어 난입하여 포탄을 마구 쏘아대었다(『고종실록』 3년 9월 9일). 이에 강화유수이인기(李寅夔)는 백련사(白蓮寺)에 모셔두었던 숙종과 영조의 어진(御眞)을 인화보 진사(鎭舍)로 옮겨 모셨다(『고종실록』 3년 9월 9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