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흥립(裵興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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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6년(명종1)~1608년(선조41) = 63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무신. 자는 백기(伯起)이다. 본관은 성산(星山)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성주(星州)이다. 아버지는 영산현감(靈山縣監)배인범(裵仁範)이고, 어머니 경주김씨(慶州金氏)는 목사(牧使)김익(金瀷)의 딸이다.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배설(裵楔)의 가까운 친척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2년(선조5)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처음에는 선전관(宣傳官)에 보임되었다가, 사복시(司僕寺)주부(主簿)를 거쳐, 결성현감(結城縣監) ·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잇달아 지냈다. 흥양현감으로 있을 때 전라좌수사이순신(李舜臣)의 명령에 따라 전함을 많이 건조하여 전란에 대비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 일어나자, 조방장(助防將)에 임명되어 방어사(防禦使)를 겸임하였다, 이순신의 휘하에서 <옥포해전(玉浦海戰)> · <당포해전(唐浦海戰)> · <한산도해전(閑山島海戰)> ·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 등에 전부장(前部將)으로 참전하여, 여러 차례 전공(戰功)을 세워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1596년(선조29) 장흥부사(長興府使)가 되었는데, 무뢰한 무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부임하여 관곡을 축낸다고 비난을 받아서 파면되었다가, 경상우수사배설(裵楔)의 조방장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원균(元均)의 휘하에서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에 배설과 함께 후부장(後部將)으로 참전하였다. 칠천량의 싸움에서 원균(元均)이 작전을 잘못 세워서 함대가 전멸당하자, 통제사원균은 배를 버리고 도망치다가 전라우수사이억기(李億祺)와 함께 전사하였다. 또 경상우수사배설도 배를 버리고 도망하자, 그는 자기가 타고 있던 단 한 척의 배로 적진에 돌격하였다. 그리고 그는 적선의 포위망을 뚫고 남은 배들을 구출한 후 함선을 진두지휘하여 왜군의 강대한 적선과 마지막까지 싸웠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자, 그 휘하에서 <명량해전(鳴梁海戰)>과 <노량해전(露梁海戰)>에 조방장으로 참전하여 전공을 세우고,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하였다. 그때 칠천량 해전에서 배를 버리고 도망쳤던 경사우수사배설은 선산(善山)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경상우수사배설은 파직당한 배흥립을 다시 조방장으로 임용한 가까운 친척이었다.

1600년(선조33) 그는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옮겼다. 1603년(선조36) 공신도감(功臣都鑑)에서 선무공신(宣武功臣)을 책훈할 때 이순신 · 원균 등과 함께 26인의 명단에 들어갔으나, 사람이 너무 많다며 줄여서 18인으로 확정할 때에 공신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1604년(선조37) 왜란 중에 세운 공로로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훈련원 지사를 거쳐,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나갔다가, 1606년(선조39)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겼는데, 도내에 사는 늙은 창기(娼妓)를 첩으로 삼고 그 말만 따르다가 말썽이 일어나서 파직되었다. 1607년(선조40) 영흥부사(永興府使)로 나갔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임하고 돌아왔다. 1608년(선조41) 10월 17일 병으로 서울 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63세였다.

성품과 일화

배흥립는 무인의 골격과 기질을 타고 났는데, 태어날 때 할머니 조씨(趙氏)가 꿈을 꾸니 대장기(大將旗)가 마당 한 가운데 꽂혀 있었다고 한다.

흥양현감으로 있을 때, 전라좌수사이순신의 명령을 받고 전선(戰船)을 많이 건조하였는데, 관가의 비용이 모자라자 자기 녹봉을 털어 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공사(公私) 간에 모두 그 덕을 보게 되었다. 전쟁 중에 통제사이순신과 도순찰사(都巡察使)권율(權慄)의 막료로서 오래도록 함께 일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옥포해전> · <당포해전>부터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 · <노량해전>까지 조방장으로 이순신을 도와 크게 활약하였는데, 그때마다 이순신은 조방장배홍립의 전공을 1등이라고 내세워 조정에 자세히 보고하였다. 1593년(선조26) 권율의 <행주산성(幸州山城) 싸움>에도 참여하였는데, 선봉장으로서 먼저 산성을 점령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왜란 때에 왜적이 쳐들어오자, 일선 지휘관들과 수령관들은 왜적과 싸우다가 불리하면 앞을 다투어 몸을 숨기거나 도망하였으나, 그는 군사를 이끌고 전진(戰陣)에 나가 왜적과 싸웠으며 전쟁 중에는 의기가 충천하여 유탄에 갑옷이 찢어져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아랫 사람을 정성스럽게 돌보아주었는데, 전쟁이 끝난 뒤에 남쪽에 떨어져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녹봉을 털어서 노자를 마련해 주었으며, 자기 병졸 중에 죽은 자가 있으면 시신을 거두어 말에 실어서 고향집으로 돌려보냈다. 평상시에 그는 집에 있을 때에 집안 살림을 걱정한 적이 없었고, 또 전공(戰功)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도 아무런 불평이 없었고, 자기 전공을 남에게 자랑하지도 않았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효숙(孝肅)이다. 묘소는 처음에 경기도 여주(驪州) 품곡(品谷)에 있었는데, 1612년(광해군4) 경상도 금산(金山) 시남(始南)의 선영에 이장하였으며, 둘째 부인과 합장하였다. 증손자 배상유(裵尙瑜)의 친구 강백년(姜栢年)이 1백여 년 뒤에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설봉유고(雪峯遺稿)』 권29) 죽은 뒤에 고향에 효자 정문이 세워졌고, 병조 판서 ·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첫째 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는 호군(護軍)심횡(沈鋐)의 딸로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고, 둘째 부인 여산송씨(礪山宋氏)는 군수송계조(宋繼祖)의 딸로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배시망(裵時望)은 선무랑(宣務郞)의 벼슬을 지냈고, 3남 배시량(裵時亮)은 경상도병마사(慶尙道兵馬使)를 지냈다. 차녀는 원산군(院山君)이숙(李琡)의 처가 되었고, 3녀는 참판(參判)목장흠(睦長欽)의 처가 되었다. 배시망의 아들 배명순(裵命純)은 덕원부사(德源府使)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전사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난중잡록(亂中雜錄)』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 『설봉유고(雪峯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