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미(朴弘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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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1년(선조 4)~1642년(인조 20) = 72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창원부사(昌原府使)와 승정원(承政院) 우승지(右承旨) 등을 지냈다. 자는 직재(直哉) 또는 군언(君彦)이고, 호는 관위(灌圍) 또는 관원(灌園)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초명은 박경립(朴敬立)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박현룡(朴顯龍)이고, 어머니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현감(縣監)윤환(尹瓛)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박사공(朴士恭)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박신겸(朴信謙)이다. 부인 서산 송씨(瑞山宋氏)는 송인범(宋仁範)의 딸이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박홍미(朴弘美)는 1603년(선조 36)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1605년(선조 38)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를 거쳐, 1611년(광해군 3)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그 뒤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 홍문관 교리(校理), 사간원 헌납(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친어머니인 김공빈(金恭嬪)을 추숭(追崇)할 때 반대 상소를 올렸으며,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한 옥사와 1615년(광해군 7)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사건(幽閉事件)> 등이 일어나자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10월 다시 병조 좌랑이 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11년 10월 8일]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첨정(僉正)과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병으로 인하여 외직을 구하였으며, 경상도 창원부사(昌原府使)가 되어서는 청렴과 덕정으로 1626년(인조 4) 2월에 표리(表裏) 1습(襲)을 하사 받았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4년 2월 6일] 또 1628년(인조 6) 1월에는 창원부사박홍미가 치적이 제일이라고 인정을 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인조실록』인조 6년 1월 25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6년 2월 3일] 1629년(인조 7) 승정원 우승지가 되었고, 그 뒤 삼척부사(三陟府使)를 거쳐 1633년(인조 11)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으며, 이어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인조실록』인조 8년 10월 21일, 인조 12년 2월 9일, 『승정원일기』인조 8년 10월 21일, 인조 9년 3월 10일, 인조 11년 6월 17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을 얻어 서산(瑞山)에 있다가, 1642년(인조 20)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72세이었다. 저서로는 그의 시문을 모아 3권 2책으로 간행한 『관포집(灌圃集)』이 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관포집(灌圃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