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재(朴弼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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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88년(숙종 14)~ 1753년(영조 29) = 66세]. 조선 후기 영조(英祖)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냈다. 자는 성적(聖績)이고, 호는 냉와(冷窩)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박태서(朴泰舒)이고, 어머니 선산 김씨(善山金氏)는 김만헌(金萬獻)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승정원 승지박세준(朴世○火+雋)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박려(朴梠)이다. 첫째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신곡(申轂)의 딸이고, 둘째 부인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구시형(具始亨)의 딸이다.

영조 시대 활동

음서(蔭敍)로 관직에 오르고, 봉사(奉事)의 신분으로 1727년(영조 3) 정시(庭試)문과(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28년(영조 4) 7월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사간원 정언 당시 그는 탕평책(蕩平策)의 허점을 경계하는 상소를 올렸다.[『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4년 7월 21일, 영조 4년 8월 7일] 1732년(영조 8) 7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733년(영조 9) 5월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을 거쳐, 그 해 7월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영조실록』영조 8년 7월 8일, 영조 9년 5월 12일, 영조 9년 7월 6일] 이어 8월에는 사헌부 지평과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校理), 사간원 헌납(獻納), 사헌부 장령(掌令) 등이 되었다.[『영조실록』영조 9년 8월 6일, 영조 9년 8월 19일, 영조 9년 10월 15일, 영조 9년 10월 22일, 영조 11년 4월 18일, 영조 13년 8월 12일, 영조 13년 9월 7일] 그러다가 1738년(영조 14) 외직으로 나가 함평현감(咸平縣監)이 되었다.[『영조실록』영조 14년 9월 20일]

1739년(영조 15) 2월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된 후, 홍문관 교리와 홍문관 부교리, 사간원 헌납,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사간원 헌납, 사간원 사간(司諫), 사헌부 집의(執義),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보덕(輔德) 등을 번갈아 가며 역임하였다.[『영조실록』영조 15년 2월 12일, 영조 15년 4월 26일, 영조 15년 5월 18일, 영조 15년 6월 1일, 영조 15년 6월 16일, 영조 15년 10월 30일, 영조 16년 9월 10일, 영조 16년 10월 29일, 영조 17년 10월 14일] 1744년(영조 20) 8월 특별히 승정원 승지가 된 후, 1750년(영조 26) 1월 하순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나, 적절한 탄핵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차되었다.[『영조실록』영조 20년 8월 29일, 영조 26년 1월 26일, 영조 26년 1월 28일]

그는 주로 홍문관과 사간원, 사헌부의 삼사(三司)의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소론(少論)을 공격하는 등 활발한 정치 활동을 하다가, 1753년(영조 29)에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