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성(朴日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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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4년(선조27)~1671년(현종12) = 78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현종(顯宗) 때 활동한 문신. 자는 학로(學魯), 호는 운암(雲岩)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경기도 남양(南陽) 출신이다. 아버지는 송촌(松村)박세훈(朴世勳)의 손자 박치공(朴致恭)이다. 13세 때 인재(認齋)박세후(朴世喣)의 손자 박치안(朴致安)의 양자가 되었다.

인조 시대 활동

1612년(광해군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25년(인조3)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 성균관전적(典籍)을 거쳐, 형조 좌랑, 병조 좌랑을 역임하면서 춘추관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항복하지 말고 대항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29년(인조7) 기사관으로 있을 때 사건을 기록하다가 실수로 붓을 떨어뜨려 인조(仁祖)의 어포(御袍)를 더럽혔는데, 승지(承旨)가 추고할 것을 청하였으나 인조가 특별히 추고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함평현감(咸平縣監)으로 나갔는데, 임지에서 학문을 장려하고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다시 병조 좌랑에 임명되어, 병조 정랑으로 승진하였으며, 성균관직강(直講)을 거쳐, 예조 정랑이 되었다. 1638년(인조16) 예조 정랑으로서 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다가 제천현감(堤川縣監)으로 나갔다. 통례원(通禮院)상례(相禮)에 임명되어 편수관(編修官),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45년(인조23) 2월 18일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청(淸)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9년 만에 돌아올 때 나가서 열렬히 환영하였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2개월 만인 그해 4월 26일에 급서하였고, 1646년(인조24) 3월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강씨(姜氏)는 인조를 저주하였다고 무고를 당하여 3월만에 사사(賜死)되었다. 그때 이 사건을 다루는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에 임명되어, 동료들과 같이 차자(箚子)를 올려서 강빈(姜嬪)을 구원하려고 애쓰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 남양(南陽)으로 돌아와서 생도들을 가르쳤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50년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고성군수(高城郡守)로 나아갔다가, 1654년(효종5)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임명되어, 좌통례(左通禮)· 우통례(右通禮)를 거쳐서, 승문원(承文院)판교(判校)가 되었다. 1661년(현종2)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나갔다가, 1666년(현종7)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이때 사간원에서 논핵하기를, “동부승지박일성은 평소에 인망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많으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현종이 처음에는 따르지 않다가 나중에 면직시켰다. 그 뒤에 승정원승지(承旨)가 되어 경력(經歷)을 겸임하고, 참찬관(參贊官)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수찬관(修撰官)을 겸임하였다. 그가 여러 번 사양해도 현종이 허락하지 않자, 결국 노병(老病)을 핑계로 스스로 사직하고 벼슬을 떠났다. 이때부터 고향 남양에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1671년(현종12) 11월 24일에 노병으로 죽으니, 향년 78세였다.

성품과 일화

박일성은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성(性)이고 효제충신(孝悌忠信)은 도(道)이다. 성(性)이라는 것은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이치이고, 도(道)라는 것은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이다. 만약 이 이치를 밝히고 이 도를 행하려고 하면, 이 마음을 버리고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여, 그의 생각을 나타내었다. 1613년(광해군5) 그가 사마시에 합격하고 과거를 준비할 때 가까운 친척 박치의(朴致毅)가 무고(誣告)를 당하여 도피하자, 그의 생부(生父) 박치공과 양부(養父) 박치안이 모두 붙잡혀서 투옥되었는데, 앞으로 집안에 어떤 화를 닥칠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때 옥사를 맡은 관원에게 글을 올려 억울한 상황에 대해 극구 개진하고, 박치의를 추적하여 잡아내는 등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가문의 화를 면하려고 노력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흑현리(黑峴里) 천마산(天磨山) 아래 낙성곡(洛城谷)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상주박씨세보(尙州朴氏世譜)』
  • 『백호전서(白湖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