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영(朴義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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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6년(세조 2)~1519년(중종 14) = 64세]. 조선 초기 후반 성종·연산군·중종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이다. 자는 거화(去華)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인데, 아버지는 예조 참의(參議)박미(朴楣)이고, 어머니 진주강씨(晉州姜氏)는 돈녕부(敦寧府)지사(知事)강석덕(姜碩德)의 딸이다. 증조부는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박절문(朴切問)이고, 조부는 의정부 좌참찬(左參贊)박중손(朴仲孫)이다. 박광영(朴光榮)박증영(朴增榮)이 형제이고, 강희안(姜希顔)강희맹(姜希孟)이 외숙(外叔)이다.

성종 · 연산군 · 중종 시대 활동

1472년(성종 3)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고, 1482년(성종 13) 알성시(謁聖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가 되었다. 호조 좌랑(佐郞), 공조 좌랑을 역임하고, 여러 차례 전직하여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으며, 1500년(연산군 6) 1월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가 되었다. 1502년(연산군 8) 7월 병조 참의(參議)와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고, 1503년(연산군 9) 2월 호조 참의가 되었으며, 1504년(연산군 10) 1월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이 해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는데, 대사간으로서 이세좌(李世佐)의 죄를 말하지 않았다 하여, 3월 중순에 충청도 문의(文義)에 중도부처(中途付處) 되었다. 나중에 풀려나와 1506년(중종 1)에 예조 참의가 되었고, 1507년(중종 2) 1월경에 병조 참의가 되었다. 1519년(중종 14) 7월 15일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의영은 학문에만 힘쓰고 말은 잘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사간이 되어서는 악류(惡類)를 밀어내고 선류(善類)를 끌어올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사람들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高揚郡) 서쪽 두응촌(豆應村) 선영(先塋)의 아래에 있다. 박훈(朴薰)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첫째 부인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생원(生員)정순언(鄭純彦)의 딸인데, 자녀는 2녀를 두었다. 1녀는 정승우(鄭承祐)의 처가 되었고, 2녀는 김달문(金達文)의 처가 되었다. 둘째 부인 김씨(金氏)는 별좌(別坐)김한신(金漢臣)의 딸인데, 1녀를 두었다. 측실(側室)에서 1남 박무(朴茂)를 두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