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숭질(朴崇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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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7년(중종 2) = ?]. 조선 전기 세조~중종 때 활동한 문신. 좌의정(左議政)을 지냈다. 자는 중가(仲嘉) · 중소(仲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조부는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좌의정(左議政)박은(朴訔)이고, 아버지는 부윤(府尹)박훤(朴萱)이며, 어머니 능성 구씨(綾成具氏)는 구강(具綱)의 딸이다.

세조 · 예종 시대 활동

1457년(세조 3)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정과(正科)로 급제하였다. 1463년(세조 9) 윤 7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고, 그 뒤 병조 정랑이 되었다가 1467년(세조 13) 12월 파직되었는데, 1468년(세조 14) 5월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가 되었다. 1469년(예종 1) 9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때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종 시대 활동

1471년(성종 2) 6월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1472년(성종 3) 12월 통훈대부 행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1474년(성종 5) 6월 사간으로서 녹피(鹿皮) 1장(張)을 하사받았다. 1476년(성종 7) 창원부사(昌原府使)가 되었고, 1477년(성종 8) 2월 대구부사(大丘府使)가 되었으며, 1478년(성종 9) 우통례(右通禮)가 되었다. 1483년(성종 14) 5월 행 호군(行護軍)으로서 도사선위사(都司宣慰使)가 되었고, 그 해 7월 상호군(上護軍)으로서 아마(兒馬) 1필을 하사받았다. 1484년(성종 15) 8월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 참의가 되었다. 1485년(성종 16) 5월 정희왕후(貞熹王后)부묘(祔廟) 때의 당상 집례(堂上執禮)였으므로 단자(段子) 견(絹) 1필을 하사받았다. 그 해 8월에 통정대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그 해 9월에 통정대부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1486년(성종 17) 1월 통정대부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고, 그 해 5월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으며, 그 해 12월 가선대부(嘉善大夫)행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1487년(성종 18) 1월 그는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다. 이때 시골에 있으면서 우민(愚民) 중에 부모와 서로 힐난하는 자, 또는 형제와 불화한 자 등을 보고 풍속을 교화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489년(성종 20) 3월 가선대부 공조 참판이 되었고, 그 해 5월 가선대부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찰사가 되어 사조(辭朝)할 때 성종께 세종 때 편찬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중에서 절행(節行)이 특이한 것을 골라 간략하게 초출(抄出)하여 박아서 반포할 것을 건의하였다. 1490년(성종 21) 5월 가선대부 호조 참판이 되었고, 그 해 7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그 해 9월에는 가선대부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 1491년(성종 22) 4월 중추부 동지사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갔다가 같은 해 9월 초에 돌아왔다. 같은 해 12월 가선대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1492년(성종 23) 2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고, 그 해 4월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1493년(성종 24) 5월 가정대부(嘉靖大夫)동지중추부사가 되고, 그 해 윤5월 가정대부 한성부 좌윤이 되었고, 그 해 6월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 판서가 되었으며, 그 해 8월 자헌대부 형조 판서가 되었다. 1494년(성종 25) 7월 자헌대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연산군 · 중종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 1) 2월 형조 판서가 되었고, 그 해 3월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1496년(연산군 2) 3월에 영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497년(연산군 3) 4월 중추부 지사와 의금부(義禁府)지사(知事), 특진관(特進官)을 겸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호조 판서가 되었는데, 1500년(연산군 6) 사이에 임금께 건의하여 상평창(常平倉)이 시행되었다. 1501년(연산군 7) 6월 공조 판서가 되었다. 1502년(연산군 8) 1월 서북지방이 허약하다 하여 변방에 옮길 사람을 하삼도(下三道)에서 뽑도록 하였다. 이때 그가 삼도 입거 도순찰사(三道入居都巡察使)가 되어 갔다가 그 해 5월에 돌아와 복명하였다. 그때 초정(抄定)한 호수(戶數)가 합계 1천 6백호인데, 장정 · 노인 · 어린이 · 남녀를 합하면 2만 1천 61명이었다. 그 해 11월에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 1503년(연산군 9) 3월 한성부 판윤이 되고, 추쇄도감(推刷都監) 제조(提調)가 되었으며, 1504년(연산군 10) 4월 다시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그 해 윤 4월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가, 그 해 입거청(入居廳) 제조(提調)가 되었다. 1505년(연산군 11)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당시는 연산군의 폭정이 절정에 달하여 벼슬을 버리려고 병과 말에서 떨어진 것을 핑계하고 여섯 달이나 등정하지 않다가 1506년(연산군 12) 7월 드디어 추국(推鞫)을 받은 뒤 면직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인 1506년(중종 1) 9월 초에 다시 복직되었다. 1507년(중종 2) 중추부 영사(領事)가 되었는데, 그 해 8월에 병이 위독하더니, 같은 달 14일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평소에 청렴하고 간소하며 근신함으로써 이름이 드러났는데, 사민 순찰사(徙民巡察使)가 됨으로써 매우 사체(事體)를 잃게 되었다고 한다.

시호와 가족

시호는 공순(恭順)이다. 첫째 부인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박중우(朴仲愚)의 딸이고, 둘째부인 예안 이씨(禮安李氏)는 이서주(李敍疇)의 딸이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