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란(戊申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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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년(영조 4) 3월 소론과 남인의 일부 세력이 연합해 영조를 축출하고 밀풍군 이탄을 추대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

개설

무신란은 1728년 그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과 남인의 일부 세력이 연합해서 일으킨 반란이다. 변란이 발생한 해의 간지를 채용해 무신변란(戊申變亂)·무신역난(戊申逆亂)·무신지란(戊申之亂)·무신지변(戊申之變)이라고도 하고, 3월에 일어난 변란이라 하여 삼월변란(三月變亂)이라고도 하며, 주동자의 이름을 따서 인좌지변(麟佐之變) 또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라고도 한다. 경종의 죽음에 영조가 관련되었다는 의혹을 명분으로 경상도·전라도를 비롯해 기호(畿湖) 지방까지 반란군이 결성되어 활동하였으며, 중앙의 금군 별장남태징과 평안병사이사성 등이 가담하였다. 무신란은 노론과 소론 간의 당쟁과 정치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이후 정국 방향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왔다.

역사적 배경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승하하고, 이어 영조가 즉위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는 양상이 되었다. 경종 연간 신임옥사(辛壬獄事)로 정국 주도권을 가졌던 소론 세력의 입장에서 영조 즉위 이후 일련의 정치적 상황은 심각한 위기였다.

이런 와중에서 노론 측의 경종을 시해하려 했던 음모로 지목된 이른바 삼수역안(三手逆案)에서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의 이름이 거론되었고, 경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영조가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경종의 임종을 지켜본 경종의 비(妃) 단의왕후 심씨의 동생 심유현의 경종 독살설과 관련한 발언은 이런 의혹에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영조를 축출하고 대신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발단

거사가 있기 전 주도 세력에 의해 세력 포섭과 거사 계획이 논의되었다. 먼저 지방 거병의 총책임자는 이인좌가 맡았고, 그의 주도 아래 경상도는 상주와 안동을 중심으로 정희량(鄭希亮)·김홍수(金弘壽) 등이 세력을 포섭하였다. 반란을 주도한 이인좌와 정희량은 남인의 명문 가문으로써 각각 윤휴의 손녀사위, 정온 봉사손의 맏아들이었다.

이인좌는 또한 정세윤(鄭世胤)과 함께 경기도 지역을 포섭하였고, 전라도 지역은 이호(李昈)를 중심으로 나주 지역의 나씨 문중이 동조하였으며, 태인현감박필현(朴弼顯)과 접촉하여 전라도 거병(擧兵)을 추진하였다. 이밖에도 평안병사이사성은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주도층과 지속적인 연결을 유지하면서 거병 계획에 참여하였고, 금군 별장남태징 등도 가담하였다.

반란 주도 세력은 재물을 축적한 부민(富民)이나 도고(都賈) 상인층을 중간 지도층으로 삼아 재원을 조달하였고, 각 지방의 행정 실무자인 군관이나 향임층이 군사의 편제와 무기의 조달, 군사 훈련 등 실무를 담당하였다. 소상인이나 소작인·노비 같은 하층민도 행동대(行動隊)로 적극 참여하였고, 변산 도적이나 경상도 토적(土賊)들도 가담하였다.

반란군의 최종 목표는 도성 공략이었다. 이들은 청주에서 거병한 후 용인이나 진위 등지에서 모인 가담자, 청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일대의 병력과 직산 사리평에서 4월 13~14일에 만나 합류한 다음, 15일에는 청주 병영을 탈취하기로 계획하였다. 이어 상주를 중심으로 이인좌의 4형제가 모으기로 한 경상도의 반란군과 나주의 나씨 문중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 반란군이 합류하여 서울로 입성하기로 하였다.

반란군의 움직임은 1728년 3월 14일 최규서(崔奎瑞)의 고변(告變)으로 조정에 알려졌다(『영조실록』 4년 3월 14일). 최규서는 모반에 참여했던 천문학교수안호와 그의 노비 막실에게서 반란군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였다. 이 밖에도 양성 사람인 김중만 등이 각지의 반군 동향을 속속 전하였다(『영조실록』 4년 3월 16일). 영조는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삼군문인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에 호위를 명하였다.

이어 3월 15일 반군 측의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령하였다(『영조실록』 4년 3월 15일). 이인좌의 청주성 점령에는 청주의 재지사족(在地士族)과 군관이 많이 참여하였고, 반노론 정서가 강한 목천·진천·충주 등지의 사족도 호응하였다. 청주성을 점령한 반란군은 충청병사이봉상, 영장남연년, 군관홍림을 살해하고 청주를 장악한 뒤 인근 지역에 격문을 보내 병마(兵馬)를 확보하고 관청의 곡식을 풀어 자신들에게 협조하는 자에게 포상하였다.

경과

이인좌가 이끄는 청주 지역 반군 세력은, 이인좌를 대원수로 하여 사전 계획대로 청주에서 목천·청안·진천을 거쳐 안성·죽산으로 향하였다. 한편 청주성 함락 소식은 3월 18일 조정에 보고되었는데, 목사박당이 반군을 피해 도망해서 비변사에 장계로 알린 것이다(『영조실록』 4년 3월 18일). 보고를 접한 조정에서는 먼저 김중기를 토벌대장으로 임명하였으나, 머뭇거리고 출정하지 않자 오명항을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에 임명하였다. 또한 박찬신을 중군에, 박문수를 종사관으로 임명하고, 군사 2천 명을 주어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후 추가로 조현명이 종사관에 임명되었다.

반란군은 이후 목천과 청안 지역을 점령한 뒤 한 부대는 죽산으로, 한 부대는 안성으로 진군하였다. 사전에 반란군의 진격로에 대한 정보를 획득한 관군 측에서는 직산으로 진군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 주력 부대를 몰래 안성으로 옮겨 반란군의 진입에 대처하였다. 결국 반란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궤멸되고, 청주성을 지키던 신천영은 박민웅 등에 의해 상당성에서 격파되었다.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할머니의 묘를 옮긴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사를 모았다. 이어 3월 20일 정희량은 이인좌의 동생인 이웅보와 함께 안음(후일 안의로 변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거창과 안음을 점령한 뒤 합천에 거주하는 조성좌의 도움으로 합천까지 점령하였다. 이때 거창현감신정모는 성을 버리고 도망갔고, 안음현감오수욱 역시 반란군 측에서 보낸 투서에 겁을 먹고 병영으로 도망갔다(『영조실록』 4년 3월 27일). 이에 경상감사황선은 성주목사이보혁을 우방장으로, 초계군수정양빈을 좌방장으로 삼아 주변의 관군을 통솔해 토벌하였다. 반군은 거창에서 함양을 거쳐 충청도의 이인좌가 이끄는 반군과 합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태인현감박필현이 반란을 주도하였는데, 박필현은 김일경과 더불어 사생(死生)을 같이하기로 하였다는 인물이다. 당시 박필현의 종형 박필몽이 1725년(영조 1) 1월 전라도 무장으로 유배되어 생활하고 있었기에 함께 난을 모의하였으며, 인근의 담양부사심유현 역시 가담하였다.

전라도 지역의 반란군은 3월 19일에 근왕(勤王)의 명분을 내걸고 경내의 군사와 말을 징발하여 조련하였다. 이어 3월 22일 반란군을 이끌고 금산사를 넘어 전주의 삼천(三川)에 이르렀다. 전라감사로 재직하던 정사효가 함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것을 깨달은 정사효가 박필현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연합하지 않았다(『영조실록』 4년 3월 25일). 반란군 진영에서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달은 군사들이 도망하고, 박필몽 역시 도망가다가 상주에서 체포되어 참형되었다. 박필현은 고부군 흥덕(興德)을 거쳐 죽도에 잠복했으나 역시 체포되어 처단되었다.

영향

무신란은 이후 여러 부분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치적으로는 여러 당파에 영향을 미쳤는데, 먼저 집권 세력으로서 난을 진압하던 소론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난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주도한 박필현·심유현 등이 소론 과격파[急少] 계열이었고, 또 이들의 공초(供招) 과정에서 많은 소론의 이름이 나왔던 사실이 소론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소론에 대해 토역(討逆)을 주장하던 노론에게는 명분의 정당성을 부여하여 이후 정치적인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유리한 입장에 있던 노론의 집권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난을 주도한 것은 소론과 남인의 일부 세력이어서 노론은 비록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난을 유발한 책임은 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난을 일으키게 된 동기가 바로 노·소론 사이에 당쟁의 여파로 소론이 정계에서 추방되어 폐족(廢族)이 된 것에 대한 불만에 있었기 때문이다.

더하여 근본적으로는 반역을 일으킨 죄인에 대한 문초를 통해, 일당만의 정권 구성에 수반되는 왕권의 위기를 직접 확인하게 된 영조가 전철을 되풀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유리한 입장이 된 것은 붕당의 혁파를 앞세우고 노·소간의 조정과 병용책을 추진하던 탕평파이다. 탕평파는 왕의 절대적인 지원하에 무신란 이후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무신란은 군사적으로도 영향을 미쳐, 왕에 의해 도성을 사수(死守)하겠다는 도성 수비론이 강하게 제기되었고, 이를 위한 도성 수비 체제가 정비되었다. 아울러 왕 호위의 강화가 추진되어 금군(禁軍)에 대한 처우 개선과 함께 강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용호영(龍虎營)의 설치는 그 결과였다.

무신란은 조선후기의 민중 운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즉 무신란을 계기로 민중 운동에서 사족층이 탈락하거나 배제되었다. 이후 민중 운동은 잔반(殘班)과 향임층이 주도하고 하층민을 여러 형태로 동원하였던 발전 단계를 거쳐 잔반과 하층민이 일체화되어 저항하는 성숙 단계로 이행하였다.

참고문헌

  • 『영조무신별등록(英祖戊申別謄錄)』
  • 『남정일록(南征日錄)』
  • 『감란록(戡亂錄)』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편, 『한국 군제사: 근세 조선 후기편』, 육군본부, 1977.
  • 이근호 외, 『조선 후기의 수도 방위 체제』,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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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범, 「1728년 무신란의 성격」,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범조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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