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군(屯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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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에는 경작을 통해 군량을 공급하고,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되는 병사.

개설

고려시대에는 북방 국경 지대인 양계에 집단적으로 경작에 종사하는 주진둔전군(州鎭屯田軍)이 존재하였다. 조선초기에는 둔군을 둔전병(屯田兵)·둔병(屯兵)이라고도 불렀고 조선후기에 주로 둔군으로 불렀다.

조선초기에는 영전(營田)이라고 통칭되는 영(營)·진(鎭)·포(浦) 등 지방 군사 기관의 둔전(屯田)이 둔전병에 의해 경작되었다(『선조실록』 27년 11월 17일). 여러 포의 둔전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서 영전의 둔전병은 곧 수군(水軍)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둔전병의 영전 경작은 영·진·포의 책임자인 병마·수군첨절제사와 만호(萬戶) 등에 의하여 감독되었다. 수군은 영전 외에도 국둔전(國屯田)의 둔전병으로 광범위하게 동원되었다. 수군의 수가 적은 함경도나 내륙에서는 차정군(次正軍)이나 수성군(守城軍)·잡색군(雜色軍) 등도 국둔전 둔전병으로 사역하였다.

내용 및 특징] [변천

둔군은 변방에서 사변(事變)이 없으면 경작하고 사변이 있으면 전쟁하므로 ‘경작하면서 전쟁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1427년(세종 9)에 북방 경계 지역에 주둔하게 된 둔수(屯守) 유군(遊軍)에 대해 가까운 땅의 비옥한 들판을 적당히 경작하게 하고 변고가 있으면 싸우게 하여 경작하면서 전쟁하도록 하는 계책이 건의되었다(『세종실록』 9년 9월 29일).

1466년(세조 12)에는 세조가 윤자운(尹子雲)에게 이러한 둔군을 설치하여 변방을 방비하는 계책을 지시하였다. 둔병할 만한 곳을 자세히 살펴보고 비밀히 병력을 넓게 주둔시켜 형적(形迹)을 드러내지 말고 군사의 수효에 따라 전지(田地)를 나누어 주도록 한 것이었다(『세조실록』 12년 12월 12일). 1467년(세조 13)에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계기로 북방에 남겨진 4,000명의 군사에 대해 함흥(咸興) 이남의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주둔시킬 것인지 여부가 논의되었다.

17세기에는 전란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군역자를 확보하는 정책이 진행되었다. 1676년(숙종 2)에는 사복시(司僕寺)가 관리하는 목장(牧場)의 목자(牧子) 및 둔군(屯軍)을, 수군인 주사(舟師)로 만들 것을 청하는 기사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1680년(숙종 6)에는 병조판서 김석주(金錫冑)가 허견(許堅)이 이천(伊川) 둔군을 동원하여 훈련하고 있는 것이 훗날 군사를 동원하기 위해서라고 간주하고 그 죄상을 아뢰었다(『숙종실록』 6년 4월 7일).

둔군은 변방이나 해안·섬에 주둔하며 국방의 임무를 완수하는 자들이면서도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키는 단서가 될 수 있는 존재로 경계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둔군은 군역자로서 국역 체계의 일환으로 전환되어 갔다.

참고문헌

  • 송양섭, 「17세기 말~18세기 전반 둔전 이정책의 논의와 전개」, 『한국문화』 28, 2001.
  • 송양섭, 「임진왜란기 국가의 둔전 설치와 경영」, 『한국사학보』 7, 1999.
  • 이경식, 「조선전기 둔전의 설치와 경영」, 『한국사연구』 제21·22합집,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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