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실(陵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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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후의 무덤을 일컫는 능(陵)과 관(棺)을 안치하는 실(室)을 합쳐서 만든 용어.

개설

조선시대의 능은 왕과 왕후의 신분으로 서거한 인물과 태조의 4대조인 도조(度祖), 환조(桓祖), 익조(翼祖), 목조(穆祖) 및 단종(端宗), 덕종(德宗), 원종(元宗), 진종(眞宗), 장조(莊祖), 문조(文祖) 등 뒤에 추존되어 종묘에 부묘(祔廟)된 왕의 무덤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재위(在位)에 있었으나 퇴위(退位)되어 군(君)으로 강등되었고 죽은 뒤에 대군의 예에 따라 묘(墓)를 조성하였기 때문에 능이라 하지 않는다.

능의 핵심 공간으로써 현궁(玄宮)이라 표현하기도 하는데, 지하에 석실(石室)이나 회격(灰隔)으로 방을 만들어 재궁(梓宮)을 안장하였다. 지상에는 봉분과 능을 장엄(莊嚴)하는 의장 석물을 세워 왕실의 위엄을 나타냈다. 조선전기에 주로 능실이란 용어를 쓰다가 후기에는 대부분 능침(陵寢)이라 표현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기에는 왕릉이나 왕실의 종친, 외척의 무덤을 구분하지 않고 능실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1398년(태조 7)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아버지 경안백(敬安伯) 강윤성(康允成)의 능실이 매우 사치하고 화려하다는 지적이 있을 만큼 왕릉과 종친, 외척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았던 것이다(『태조실록』 7년 7월 5일). 태종 이후로는 왕과 왕후의 무덤만을 능실이라 하게 되었다.

조선 왕릉의 규모에 대한 최초의 규정은 1406년(태종 6)에 마련되었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원릉산(原陵山)이 사방 323보(步) 규모였던 것을 기준으로 하여 반으로 줄인 161보로 정한 것이다. 4방으로 각각 80보 정도의 규모로서 1407년(태종 7) 건원릉(健元陵)에 행차한 태종이 능실을 둘러본 후 비문(碑文)을 보았다는 기록이나 1418년(세종 즉위) 왕이 능에 배알하는 의식 절차를 정하면서 대차(大次)는 능소(陵所)의 가까운 곳에 설치하고, 소차(小次)는 능실의 곁에 설치한다는 기록을 통해 봉분이 위치한 강(岡)을 능실로 표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즉위년 12월 17일).

조선 능실 제도가 확립된 것은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을 조성하면서부터이다. 건원릉, 후릉(厚陵), 헌릉(獻陵) 등을 조성할 때마다 논의를 통해 정하던 것을 세종이 하나의 제도로 규정한 것이다. 왕과 왕후를 합장하는 경우 고려공민왕릉이나 헌릉과 같이 현궁은 같이 하고 실(室)을 다르게 하여 왕후의 실은 동쪽에 두고 왕의 수실(壽室)을 서쪽에 두었다. 광(壙)의 깊이는 10척(尺), 동서 29척, 남북 25척 5촌(寸)이었고 남면(南面)을 열어 놓아 연도(羨道)로 삼았다. 능실의 광중을 10척으로 파는 것은 범인(范麟)이 쓴 『착맥부(捉脈賦)』 주석(註釋)에서 ‘1장(丈) 깊이 이하는 우습(雨濕)이 능히 이르지 못하고 한기(旱氣)도 침입하지 못한다.’고 하였고, 사마광(司馬光)이 ‘광중을 파는 것은 마땅히 깊어야 할 것이니, 깊으면 도적이 가까이 하기 어렵다.’라는 설(說)과 이미 실행한 구례(舊例)를 따른 것이었다.

합장하는 석실(石室)을 만드는 순서를 살펴보면, 석실을 설치할 광중을 파낸 후, 석실을 구성할 돌들이 자리할 곳은 2척 5촌을 더 파서 기초를 만든다. 석실의 재궁이 안치될 자리는 유회(油灰), 박석(博石), 문역석(門閾石)을 배설한다. 격석(隔石)을 내려서 두 개의 실(室) 사이에 세우고, 우석(隅石)과 방석(傍石)을 내려 무쇠못[水鐵錠]으로 고정한다. 다음에 석체(石砌)를 내리고 사방에 모두 협석(挾石)을 둔다. 덮개돌[蓋石]을 덮고, 그 위에 가치개석(加置蓋石)을 얹는다.

왕의 수실은 모래 등으로 메우고 문비석(門扉石)을 임시로 가로 걸쳐서 막아 둔다. 또 물에 갠 석회(石灰)로 석재 사이의 틈을 바른 후 석실 밖에 각기 4척을 떨어져서 속판을 빙 두르고 삼물(三物), 즉 석회, 황토(黃土), 세사(細沙)를 사용하여 쌓고 나서, 속판을 걷어내고 숯가루 채우기를 반복하여 가치개석 위까지 쌓아 올린다. 그리하여 가운데는 높고 4면은 낮아 가마솥을 덮은 형상이 만들어진다.

왕후의 동실(東室) 개석에는 먹을 칠하여 하늘의 모양을 만들고, 동쪽에 해와 서쪽에 달을 그리고, 성신(星辰)과 은하를 모두 성좌(星座)로써 둥글게 그린다. 그 천상(天上)의 밖과 4면의 벽(壁)에는 모두 분을 칠하여 바탕으로 삼아 서쪽이 되는 격석에 백호(白虎), 북쪽 우석(隅石)현무(玄武), 방석에 청룡(靑龍), 문비석에 주작(朱雀)을 그린다. 백호와 청룡은 머리가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현무와 주작은 머리가 서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재궁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윤여(輪轝)를 석체 위와 현궁 문밖에 두었다가 재궁을 들여서 안치한다. 머리쪽은 북쪽에 두고, 윤여를 물려 내고 나서, 옥백(玉帛)을 드리고 명기(明器) 등을 진열한다. 발[簾]을 문안에 드리우고 문비석을 세운 후 유회를 두 문짝의 틈난 곳에 바른 다음 자물쇠를 채운다. 그리고 문의석(門倚石) 1개를 더 세우고, 문의석 밖에는 돌로 편방(便房)을 만들어 명기(明器)를 넣는다. 다음에 삼물을 석실 밖에 쌓아 두께가 4척 되게 하고, 숯가루 두께가 5촌 되게 하여 3면을 쌓는다. 그 밖으로는 돌로 배열(排列)하고 흙을 사이에 넣어 메운다.

평지 위에는 동·서·북 3면에 지대석(地臺石) 놓을 자리를 견고하게 쌓아 올리고 초지대석(初地臺石)을 배치한 다음에 정지대석(正地臺石)을 그 위에 설치한다. 병풍석의 모퉁이 돌과 면석(面石)을 정지대석의 위에 둔 다음에 만석(滿石)을 설치하고, 또 인석(引石)을 만석 위에 더 얹어 단단하게 고정한다. 정지대석·우석·면석·만석의 서로 연접(連接)한 곳에는 모두 무쇠를 사용하여 고정시킨다. 병풍석 안쪽은 본래의 흙으로 만석의 상변(上邊)에 5촌 아래까지 견고하게 쌓는데 중앙은 높고 4면은 낮게 만든다.

봉분은 흙으로 쌓고 둥글게 깎는데, 능 높이가 12척 5촌이다. 또 12면 초지대석 밖에 난간석(欄干石)을 설치한다. 난간석 밖으로 동·서·북 3면에는 원장(垣墻)을 두르는데 그 자리에 넓이 3척, 깊이 2척 가량 파서 삼물로써 견고하게 다진다. 지대석의 높이는 1척이고, 원장의 높이가 3척 4촌이다. 곡장(曲墻) 북면(北面)에 초계(初階)와 상계(上階) 등 2단의 섬돌을 설치한다. 곡장 안에는 석양(石羊) 4개와 석호(石虎) 4개를 벌려 놓는데, 석양은 남쪽에 두고 석호는 북쪽에 있게 하되, 서로 뒤섞어서 배치하여 밖을 향하게 한다.

남쪽에는 삼계(三階)를 설치하는데, 초계의 넓이가 16척이고 길이가 107척이다. 남쪽 7척 가량 되는 곳에 땅을 5척 판 후 지석(誌石)을 안치하고 남쪽 가까이 석상(石床)을 두고 왼쪽과 오른쪽에 망주석(望柱石)을 세운다. 중계(中階)는 넓이가 20척인데, 한가운데 북쪽으로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고, 왼쪽과 오른쪽에 문석인(文石人) 각각 1개와 석마(石馬) 각각 1개를 세운다. 하계(下階)는 넓이가 30척인데, 왼쪽과 오른쪽에 무석인(武石人) 각각 1개와 석마 1개를 세운다. 산기슭으로부터 바로 남쪽 45척 사이에 정자각(丁字閣)을 세우고, 남쪽에 고방(庫房)을 설치하고, 그 재실(齋室)을 적당한 곳에 세운다. 정자각 앞길에 홍살문[紅箭門]을 세운다. 이와 같은 공역은 산릉도감(山陵都監)에서 담당하는 것으로서 대개의 경우 산릉 장소를 정한 후부터 재궁을 안치하고 석물을 배설할 때까지 3~5개월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조선왕실에서는 능지기[陵直] 2인과 수호군(守護軍) 100호(戶)를 두어서 능실을 지키게 하였다. 1445년(세종 27) 서반(西班) 5품으로서 호군(護軍)에 올려 제수하는 자도 수호군이라 하여 칭호(稱號)가 서로 중복되어 분간하기 어렵게 되자 능실의 수호관을 수릉관(守陵官)으로 고쳤다. 수호군 외에도 능실 주변에는 사찰을 두어 원찰(願刹)로 삼았다(『세종실록』 27년 5월 6일). 1443년(세종 25) 세종은 개경사(開慶寺)가 조종(祖宗)의 원찰로서 능실과 가까이 접해 있다는 이유로 유생(儒生)의 출입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원찰은 능실의 명복을 비는 일 이외에도 각종 부역(赴役)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세종실록』 25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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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석실을 조성하는 것은 대단히 많은 노동력과 비용이 소요되었다. 특히 석실에 사용되는 거대한 돌을 옮기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1420년(세종 2) 상왕 태종은 능실의 두 방석(傍石)과 덮개돌을 1개의 돌로 쓰려면 운반하기가 매우 어렵거니와 죽은 사람에게는 도움이 없고 백성에게만 해가 된다며 2조각으로 나누어 쓰게 하고 상세히 기록하여 후세 자손으로 하여금 이를 따르도록 하여 산릉 조성 공역의 부담을 줄이고자 하였다.

산릉 공역에 소요되는 부담을 축소하려는 노력은 7대 세조대에 이르러 무덤방을 석실 대신에 회격으로 만들고 병풍석도 설치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내려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석실을 조성하는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태종 때부터 검토되던 방안이 회격이었다. 회격 사용을 주장하였던 것은 호순신(胡純臣)의 기혈론(基穴論)에서 전실(磚室)을 만들면서 밑바닥에 벽돌[甃]을 쓰지 않으면 지기(地氣)가 통하게 되고, 수맥(水脈)이 새어 나가게 되며, 관(棺)을 달아서 내리면 땅을 넓게 허물지 않아서 그 기운을 아낄 수 있다는 점과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제시된 회격설에 근거하였다. 회격설에서는 ‘회(灰)는 나무뿌리를 막고 물과 개미를 방지한다. 석회는 모래를 얻으면 단단해지고, 흙을 얻으면 들러붙어서, 여러 해가 되면 굳어져서 전석(塼石)이 되어, 개미와 도적이 모두 가까이 오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주자가례』를 받아들인 조선에서는 모래와 석회로 격지(隔地)를 만들어서 세월이 오래가면 전석(塼石)이 되고, 그대로 석실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세조의 유교(遺敎)는 지나치게 사치하고 제한(制限)을 넘어 장사(葬事)를 치르는 풍조에 대해 왕실에서부터 검소한 덕을 밝히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따라 1468년(예종 즉위) 예종은 광릉(光陵)을 회격으로 만들도록 하였으며 봉분 주위에 두르는 병풍석을 생략하였다. 같은 시기에 여주로 천장한 세종의 영릉(英陵)과 1469년(예종 1) 예종 서거에 따라 조성된 창릉(昌陵) 역시 광릉의 제도를 따르게 되어 조선 왕릉 제도로 굳어지는 듯하였다.

회격을 쓰고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은 광릉의 경우 봉분을 삼물로 단단하게 쌓아 놓아서 잔디뿌리가 깊이 뻗어 들지 못하여 비에 봉분이 무너지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병풍석을 다시 설치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사토(莎土)로 덮어 잔디뿌리가 깊이 들어가 얽혀서 붕괴를 방지할 수 있도록 삼물을 좀 얕게 깎아 내리고 황토를 두껍게 쌓는 방법으로 수리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으로 인해 선릉(宣陵)을 조성할 때는 회격을 쓰되 봉분에 병풍석을 다시 설치하기 시작하여 17대 효종의 영릉(寧陵)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그 후 1673년(현종 14) 영릉을 천장할 때부터 검소한 장례를 주장하는 신하들의 주장이 받아 들여져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1731년(영조 7) 장릉(章陵)을 천봉하였을 때와 1789년(정조 13)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하면서 병풍석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조선후기 왕릉에서는 난간석이 왕릉을 상징하는 의장물이 되었다. 그 후 황제릉 양식을 취하여 조성된 고종의 홍릉(洪陵)과 순종의 유릉(裕陵)에서 다시 병풍석을 설치하였다.

의의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아 『주자가례』에 입각한 사회 제도로 만들어나간 조선은 국초에 고려의 왕릉 제도를 계승하여 능실에 석실을 설치하다가 회격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세조 때부터는 석실 대신 회격을 채용하였다. 회격을 사용하던 초기에는 병풍석까지 설치하지 않아 사실상 왕릉이 초라해 보이는 상태까지 이르렀으나 사대부 사회의 사치풍조를 방지하고 검소한 덕을 밝히려는 왕실의 솔선수범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사대부의 분묘는 석실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석양, 석호, 석마 등의 의장 석물은 왕릉에서만 설치하게 되었다. 이처럼 능실 제도가 변화하게 되는 것은 성리학적 신분 질서를 분묘에까지 확대 적용한 결과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정해득, 『정조시대 현륭원 조성과 수원』, 신구문화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