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실(石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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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중(壙中)에 석재(石材)를 쌓아서 만든 묘.

개설

조선시대 묘제에 대한 것은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보급과 많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성리학과 함께 보급되어 16세기 중엽 명종 때부터 많은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에 『주자가례』의 보급과 유교의 영향은 새로운 묘제인 회격묘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반 평민 계층 이하에서는 토광묘가 많이 사용되었고, 사대부 계층에서는 석실묘 대신 회격묘를 주로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왕릉의 제도는 고대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선사시대의 고분 양식은 시체를 적절하게 위생적으로 처리할 뿐 아니라, 죽은 사람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고안된 시설물이다. 장묘 방법은 크게 굴장(屈葬), 신전장(伸展葬), 이차장(二次葬), 화장(火葬) 등으로 나누어진다.

묘제는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큰 변화를 보이게 된다. 수십 개의 군장 국가와 연맹 왕국들이 고구려와 백제, 신라로 합쳐 국가 형태를 갖추게 되면서,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호화롭고 장대한 고분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묘는 단순히 죽은 사람을 땅에 묻는 장소 이상의 의미, 즉 죽은 사람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고 그 영혼은 살아 있는 후손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묘는 살아 있는 사람이 사는 주택에 못지않게 정성껏 만들어졌다.

신라의 묘제는 통일기로 접어들면서 고구려, 백제의 그것과 같은 합장용의 횡혈식(橫穴式) 석실묘로 서서히 바뀌어 갔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평지에서 산지로 입지가 변화되었으며 산릉(山陵)이라는 개념의 묘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유행하면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서 볼 수 있었던 거대한 봉토분의 전통은 차츰 사라지게 되었으며, 당시 당나라에서는 산줄기의 길흉을 따지는 풍수학이 성행하였다. 이는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능인 괘릉(掛陵)부터는 왕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물론이고, 문인석과 무인석, 봉토 호석에 십이지상까지 완벽하게 갖춘 왕릉이 출현하게 되었다. 또한 평지가 아닌 구릉지로 묘소의 입지가 바뀌게 됨에 따라 묘지를 선정하는 기준으로 풍수지리설이 폭넓게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의 왕릉은 산의 기운을 받기 위해 계단을 만들었으며, 광(壙)을 깊이 판 덕택에 신라의 왕릉보다는 봉분이 작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구릉지에 입지하고 봉분을 작게 만들고 병풍석, 난간석 등의 조영 기법은 고려와 조선 왕릉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조선왕조의 제사 시설은 건국 후 30년~40년 사이에 그 형식이 갖추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으면서, 도성은 물론이고 지방 각 도시의 중심부에는 예제와 관련된 시설물들이 속속 건립되었다. 그중에도 길례, 즉 각종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시설이 많이 세워졌으며, 이러한 제사 시설에는 유교가 갖는 합리성이나 질서를 존중하는 정신이 반영되어, 5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조선의 기본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변천

1. 고려 왕릉을 답습한 조선초기 왕릉

조선왕실에서는 건국 직후부터 고려말기의 정치적, 문화적 혼란을 불식하고 새로운 집권 체제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이에 국가 의례를 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조성된 태조의 비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제릉(齊陵)은 고려와 조선의 전환점이 되는 왕릉으로, 현재 북한에 위치하고 있다. 정종의 비 정안왕후(定安王后)의 후릉(厚陵) 또한 북한에 있으나, 『세종실록』에는 석실의 너비와 길이, 높이 등 석실의 구조 대부분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석실은 양 벽면에 위치하는 부재로 북우석과 문입석을 지지하여 설치된다. 석실 천장에 위치한 개석은 석실의 부재 중 가장 크다. 먼저 석실 후면에 놓이는 개석 밑 턱을 두어 북우석과 양방석 위에 설치한다. 개석은 석실의 구조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재이다. 석실에 재궁이 안치된 뒤 문비석으로 이를 막고 석실의 문을 닫게 되는데, 전면 개석은 문비석이 석실 안으로 밀리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석실 현궁의 구조는 국가 의례가 정립되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편찬된 성종대까지 유지되고 보완되어 더 견고하고 안정적인 구조로 변화되었다.

2. 조선의 국가 의례 정립과 『세종실록』「오례의」

조선의 국가 의례 정립은 세종대에 학술 기관을 중심으로 심도 있는 옛 제도의 연구가 진행되어 『세종실록』「오례의」를 편찬하게 되었으며, 성종대(1474년)에는 『국조오례의』를 편찬하는 등 왕릉 묘제와 제도를 완고히 하였다. 이러한 「오례의」의 석실 현궁(玄宮: 왕의 관을 묻은 광중)은 합장릉으로 동실과 서실로 구분되며, 석부재는 단릉과 비슷하나 두 개의 석실을 축조해야 하기 때문에 칸막이 벽인 격석을 설치하였다.

동실은 북우석의 동쪽 끝에 서실과 같은 반턱맞춤으로 방석과 결구되며, 북우석이 연이어 놓인 상접하는 부분 중앙에 좌우를 비스듬히 파서 격석의 북쪽 끝이 들어가도록 하였는데 그 형태가 목구조의 주먹장맞춤과 같이 파서 격석이 들어가 빠지지 않도록 결구한다. 북우석과 양방석의 맞춤도 중요하지만 격석의 중요도가 가장 높으며, 측면의 압력으로부터 격석이 북우석과 이격되는 것을 방지해 주고 석실 안으로 쏠리는 것을 막아 주는 두 가지 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격석이다.

참고문헌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
  • 『춘관통고(春官通考)』
  • 문화재관리국, 『헌릉(원경왕후능)해체실측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89.
  • 목을수, 『고려·조선능지』, 문성당, 1991.
  •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상편』, 민속원, 1985.
  •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하편』, 민속원, 1992.
  • 김상협, 「조선 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의 변천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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