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광(金鍊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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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4년(중종 19)∼1592년(선조 25) = 69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회양부사(淮陽府使) 등을 지냈고, 예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자는 언정(彦精) 또는 중정(仲精)이며, 호는 송암(松巖)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거주지는 황해도 개성(開城)이다. 아버지는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김이상(金履祥)이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다. 이경화(李敬和)의 외4촌 형이기도 하다.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 형제와 친밀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회양부사로 부임하였으나, 이미 관원들과 군사들이 모두 도망쳐버렸으므로, 성문 앞에 부부가 정좌한 채 왜적과 당당히 맞서다가 왜군에게 참살 당하였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진사과(進士科)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6세였다. 그리고 32세가 되던 1555년(명종 10)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평안도성천교수(成川敎授)로 보임되는 것을 시작으로, 내직으로는 교서관(校書館)정자(正字)봉상시(奉常寺)주부(主簿),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 사직서(社稷署) 영(令), 제용감(濟用監)첨정(僉正)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부여현감(扶餘縣監), 옹진현감(瓮津縣監), 온양군수(溫陽郡守), 봉산군수(鳳山郡守), 한산군수(韓山郡守), 면천군수(沔川郡守), 평창군수(平昌郡守), 평양판관(平壤判官)을 두루 역임하였다. 내외 관직을 역임하면서 김연광 모두 청렴하고 성실하게 직임을 수행한다는 명성이 높았다. 평창군수로 있을 때 치적을 높이 평가 받아, 회양부사로 승진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54 「김연광(金鍊光)」 이하 「김연광묘갈」로 약칭]

<임진왜란> 때 회양 부사 김연광의 순직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중국 명(明)나라를 치는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다가 조선에서 이를 거절하자,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왜군 9부대 16만여 명을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해 5월 5일 서울을 점령한 왜군은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군사는 평안도 방면으로 진격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사는 철령(鐵嶺)을 넘어 함경도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선조는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義州)로 피난하였는데, 이때 김연광이 회양부사로 임명되었다. 회양부는 강원도의 북쪽 지방으로, 함경도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왜군이 개성과 평양을 함락시키고 병졸을 나누어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가 철령을 넘어서 함경도 방면으로 진격하였는데, 가토 기요마사는 제 4부대 모리 요시나리[森吉成]에게 명하여 1만 4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회양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때마침 김연광이 왕명을 받고 강원도회양부사로 부임하였으나, 이미 회양부의 관리와 군사들이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쳐버렸기 때문에, 성곽과 해자는 텅 비었고, 병기(兵器)는 모두 내버려져서 형편없이 못쓰게 되었다. 이에 김연광은 도저히 왜군과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도망치는 것보다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김연광이 부임한 지 10여 일도 채 안 된 6월 5일, 모리 요시나리의 대군이 회양성으로 일제히 공격해 왔다. 비장(裨將) 한 사람이 김연광에게 잠시 이곳을 피하자고 권유하였으나, 김연광은 “자기의 몸을 생각지 않고 나라를 위하는 것은 지방을 지키는 신하의 본분이다. 의리상 마땅히 나라와 더불어 운명을 함께 해야 하는데,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달아난다는 말인가” 하고, 성문 앞에 거적자리를 깔고 홀로 앉아 대성통곡을 하였다.[「김연광묘갈」]

왜군이 경내 안으로 공격해 들어와도 김연광은 끝내 꼼짝하지 않고,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서는 단정히 앉아 절명시(絶命詩)를 지었다. 그 곁에 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도 남편과 함께 나란히 앉아서 순국하려고 하였으므로, 김연광이 부인에게 자리를 피하라고 명하였으나, 부인이 거절하기를, “부사는 충신으로서 순국하려고 하는데, 저는 열녀로서 죽으려고 합니다” 하였다. 왜군이 들이닥쳐서 김연광을 위협하려고 먼저 칼로써 손가락을 내리찍었으나, 김연광은 손가락이 잘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왜군을 향하여 엄중하게 꾸짖고 굴복하지 않았다. 왜군이 창과 칼로써 김연광과 그 부인을 연달아 찔러 마침내 두 사람을 참살하였는데, 그때 김연광의 나이가 69세였다.[「김연광묘갈」]

회양부사김연광이 순국한 사실이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에 알려지자, 선조가 말하기를, “김연광 부부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절개는 대단히 빛나니, 특별히 정려(旌閭)하고 그 후손을 녹용(錄用)하라”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성혼(成渾)이 상소하여 왜적과 싸우다 순직한 회양부사김연광과 동래부사(東萊府使)송상현(宋象賢)·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유극량(劉克良)에게 증직(贈職)할 것을 청하였고, 영의정유성룡(柳成龍)도 왜란이 일어났던 초기에 순절한 신하들을 왕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선조수정실록』 25년 12월 1일),(『선조실록』 26년 10월 29일) 이에 조정에서는 김연광에게 예조 참판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추증하였다.[「김연광묘갈」]

김연광은 시문에 능하고 박학하였는데, 저서로는 『송암유고(松巖遺稿)』 한 권이 남아 있다. 한편 그의 6대손 김두문(金斗文)도 시문에 뛰어났는데, 1773년(영조 49) 7대손 김생해(金生海)가 김이상·김연광·김두문의 유고를 합하여 『심적당⋅송암⋅경승재 유고합편(心適堂松巖敬勝齋遺稿合編)』을 간행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은 온화하고 순후하며 강직하고 청렴하였다. 평안도성천교수로 보임되었을 때, 여러 생도들이 전례에 따라 몇 필(匹)의 비단을 가지고 와서 예물로 바쳤는데, 김연광은 단호하게 이를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이리하여 평안도 성천 고을 사람들은 김연광을 ‘단주 선생(斷紬先生)’이라고 불렀다.[비문] 김연광은 시문에 능하고 박학하였으며 강직하고 청렴하면서 깨끗한 풍모를 지녔다. 평소 좌의정윤두수가 김연광의 학식과 인품에 경탄하여, 그의 집을 찾아가서 그 어머니에게 절하고 두 사람이 ‘형제의 의’를 맺기도 하였다.

김연광은 평상시 생활할 때에 아무런 욕심이 없어 남들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궁색함을 당하여도 남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비록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일이 있을지라도 태연하게 대처하였다. 오로지 아버지 김이상을 섬기는 것만 생각하여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간혹 지방관으로 나가 있다가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운 생각이 들면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그는 한결같이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어 순종하며, 아버지를 즐겁게 하였다. 아버지 김이상의 『심적당유고(心適堂遺稿)』를 간행하게 되었을 때에는 찬성윤근수에게 다시 유고를 위촉하여 아버지의 유의(遺意)를 더욱 가다듬어 간행하였다.[「김연광묘갈」]

묘소와 후손

묘소는 황해도 장단(長湍)천성산(天聖山) 아래 법당(法塘)의 서쪽 산기슭 선영에 있는데,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묘갈(墓碣)이 남아있다. 그가 죽은 지 80여 년이 지나도록 무덤에 비석이 없었는데, 현손(玄孫) 김초실(金楚實)이 박세채에게 비문(碑文)을 부탁하여 비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황해도 개성의 숭절사(崇節祠)에 제향되었다. 개성의 유생(儒生)들이 정몽주(鄭夢周)의 사당 곁에 숭절사를 세우고, 송도(松都) 출신 회양부사김연광과 동래부사송상현·중추부 첨지사유극량을 아울러 향사(享祀)하였다.

부인 전주 최씨는 이조 좌랑(佐郞)최개(崔漑)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1592년(선조 25) 6월 5일 김연광이 회양성 앞에서 순절할 때 그 부인도 그 곁에서 남편과 함께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장남 김하손(金賀孫)은 사마(司馬) 양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박사(博士)를 지냈고, 차남 김질손(金質孫)은 참봉(參奉)을 지냈다.[「김연광묘갈」]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일성록(日省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송암유고(松巖遺稿)』
  • 『심적당⋅송암⋅경승재 유고합편(心適堂松巖敬勝齋遺稿合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남계집(南溪集)』
  • 『수현집(壽峴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