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수(金彦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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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4년(선조 7)∼1627년(인조 5) = 54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무신.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 등을 지냈다. 자는 명수(命叟)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기자전(箕子殿)참봉(參奉)김용필(金龍弼)이며, 할아버지는 김맹건(金孟健)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여절교위(勵節校尉)김철손(金哲遜)이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순변사(巡邊使)남이흥(南以興)과 함께 안주성(安州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전사하였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1593년(선조 26)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0세였다. 이때는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각지에서 전투가 치열할 때였는데, 파총(把摠)에 임명되어 부원수(副元帥)의 막하(幕下)에서 왜적과 싸워서 전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왜적을 추격하여 부산포(釜山浦)에 이르러 주둔하였다. 울산에 주둔하였던 왜군이 철수하고, 군사가 서울로 돌아오자,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김응하(金應河) 장군이 원정군을 거느리고 명(明)나라를 도와서 후금(後金)의 누르하치와 싸울 때 요하(遼河)의 전역(戰役)에서 부원수가 그의 용력(勇力)을 듣고 다시 파총에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산(理山)에서 여진족을 무찌르게 하였으나, 도중에 병이 나서 진군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순변사남이흥이 그를 발탁하여 동영장(東營將)으로 삼았다. 후금의 오랑캐 군사 3만여 명이 의주성(義州城)을 돌파한 뒤에 안주성을 공격하였는데, 동영장김언주는 순변사남이흥과 함께 안주성을 방어하였다. 오랑캐 군사가 성 위에 기어 올라오므로, 동영장김언주는 순변사남이흥을 도와서 오랑캐의 칼날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가, 결국 안주성이 적에게 함락되였다. 이에 김언수는 구성부사(龜城府使)김상의(金尙毅)와 함께 “불에 몸을 던져 죽는 것은 적을 죽이다가 죽는 것만 못하다”면서 활쏘기와 격투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나이가 54세였다.(『인조실록』 5년 4월 22일),[『승정원일기』인조 5년 4월 22일]

성품과 일화

어려서부터 간담이 크고 건장하여 위엄스런 모습이 있었으며, 어깨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왜적을 추격하여 부산포에 이르러 주둔할 때 도원수와 부원수가 여러 병사들을 모아서 무용을 겨루게 하였는데, 김언수가 항상 1, 2등을 차지하였으므로, 도원수가 그 사람됨을 훌륭하게 여겨 나라에 보고하여 선조가 내린 홍종마(紅鬃馬)와 안장⋅굴레 등을 상으로 내려주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순변사남이흥이 그를 발탁하여 동영장으로 삼았는데, 안주성의 성지(城池)가 완전하지 못하고, 또 군사들의 방비가 소홀하여, 상하 군민(軍民)들이 장차 성을 보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서 모두 흩어져서 도망갈 마음만 가지고 있었다. 그때 김언수와 친한 사이였던 군인 박인봉(朴仁奉)이 김언수의 옷자락을 잡고서 함께 도망가자고 애원하자, 김언수가 성난 목소리로 꾸짖기를, “주수(主帥)가 죽기로 작정하고 성을 지키는데, 내가 어찌 차마 버리고 가서 홀로 온전하게 살기를 구하겠는가.”라고 하고, 거절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속고 권7 「김언수행장(金彦壽行狀)」]

묘소와 후손

안주성에서 불속에 뛰어들어 죽었으므로, 시체를 찾을 길이 없어, 그가 남겨 둔 옷을 가지고 초혼(招魂)하여 위패(位牌)를 만들고, 평안도 안주(安州) 갈곶(葛串) 여석현(礪石峴)의 서쪽 산기슭에 장사지냈다.

안주성에서 전사한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자, 나라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의(參議)추증(追贈)하는 한편, 그가 살던 마을의 집 앞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었다. 1682년(숙종 8) 안주성에서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찰사남이흥·목사김준(金浚) 등을 위하여 그들이 순절한 곳에 충민사(忠愍祠)라는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김언수는 동무(東廡)에 배향되었다.(『숙종실록』 7년 7월 26일)

부인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유학(幼學)정광필(鄭光弼)의 딸인데, 1630년(인조 8) 남편의 직첩에 따라 숙부인(淑夫人)이 되었다. 자녀는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충일(金忠一)·김충립(金忠立)·김충상(金忠尙)이고, 딸은 오덕원(吳德元)·조묵(趙黙)·이기서(李起恕)에게 출가하였다. 김언수가 중년 때에 질병에 걸려서 숨이 넘어가려고 할 때 맏아들 김충일이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약에다 타서 먹이자 김언수가 다시 깨어났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나라에 보고하여 정려(旌閭)되고 복호(復戶)되었다.(『효종실록』 2년 6월 4일)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서애집(西厓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약천집(藥泉集)』
  • 『돈암전서(遯菴全書)』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사재집(思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