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변사(巡邊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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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명으로 변방의 방비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파견한 임시 관직. 때때로 변방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장수들의 직임으로도 활용되었음.

개설

순변사(巡邊使)는 조선시대 지방의 방비(防備)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파견된 여러 형태의 사신 가운데 비교적 늦은 시기부터 보내졌다. 성격도 조금 달라서, 재상급 인사가 아닌 일반 관료를 택해 파견했다. 현지의 지방관들을 통솔하기보다 맡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협의 대상자였다. 일이 발생했을 때 이를 처치하기 위해 임시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때때로 변방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장수들의 직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담당 직무

최초의 파견 기록은 1467년(세조 13) 12월에 부호군김견수(金堅壽)와 중추부 첨지사황사윤(黃斯允)을 평안도에 파견한 것이었다(『세조실록』 13년 12월 17일). 그들을 파견한 목적은 그해 9월에 강순(康純) 등이 건주위(建州衛) 여진족들을 공격하여 그 우두머리 이만주(李滿住) 부자를 제거했던 일과 관계가 깊었다. 그 남은 무리가 복수를 꾀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와 그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보내면서 베풀어야 할 조치들을 사목(事目)으로 손수 정리해서 동봉했다. 아울러 평안도감사와 병사에게 방비에 관해서는 이들과 의논해서 처치하라고 별도로 지시했다.

이것이 역사상 첫 번째로 순변사가 파견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를 통해 그 파견의 속뜻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부호군은 종4품, 중추부 첨지사는 정3품이었다. 일반적으로는 품계에 비추어볼 때 후자가 앞에 기록되는 정사여야 하고 전자는 부사에 해당해야 하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부호군김견수의 비중이 더 높았음을 의미했다. 즉 이번 임무에서는 그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뜻이다.

나아가 이들의 품계를 볼 때 현지의 감사와 병사를 통괄하는 위치에 설 수 없었다. 그것은 비슷한 시기에 군무(軍務) 등의 일로 자주 파견되었던 체찰사나 순찰사 등과는 달랐다. 부호군은 감사·병사와 의논해서 도울 수는 있겠으나 통괄하는 위치는 아니었으며, 그런 점에서 분명히 차이가 났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당시 순변사는 해당 지역의 방비 상황을 점검하여 처리하고 현지 지방관과 의논하는 일이 주된 직무였을 것이다. 재상급 인사를 파견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건주위의 우두머리가 제거되었으니 남은 무리의 보복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 재상급이 아닌 일반 관료 수준의 인물을 파견하고 그에 적절한 호칭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 뒤 한동안 파견되지 않았다가 성종 중반 무렵부터 다시 보내졌다. 특히 1491년(성종 22)에 전라도와 경상도에 파견되었다(『성종실록』 22년 7월 17일). 목적은 왜인(倭人)이 몰래 일어날 경우, 이를 무찌르기 위함이었다. 이를 계기로 양계가 아닌 지역에도 보내게 되었다. 아울러 종사관(從事官)을 대동(帶同)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필요시에는 적절한 사람을 택하여 함께 갔을 것이다.

변천

순변사는 비슷한 시기에 여러 이름으로 파견된 다른 사신들에 비해 처음에는 파견이 드물었으며, 중종 때에 이르러 비교적 자주 보내졌다. 이는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기보다 일이 있을 때마다 파견되는 임시적인 속성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어느 법전에서도 순변사에 대한 규정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변방에 ‘변(變)’이 생길 때마다 임시로 파견했던 직책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군대를 인솔하고 직접 전투를 하며 필요시 현지 지방관들을 통솔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1497년(연산군 3) 전라도로 나가는 이계동(李季仝)에게 병부(兵符)를 지급하여 해상을 순행하되, 병마·수군절도사를 지휘해서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포획 섬멸하라는 하교를 내렸다(『연산군일기』 3년 3월 12일). 현지 병력을 동원하여 직접 전투를 지휘하는 장수의 직함으로 활용되었다. 1512년(중종 7) 함경도로 파견된 황형(黃衡)은 전투를 직접 통솔했다(『중종실록』 7년 9월 4일). 그러나 여전히 방비에 관한 조치나 순찰을 통해 조사하는 일이 중심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군대를 이끌고 싸우는 지휘관의 직임으로 활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이일(李鎰)을 순변사에 임명하고 정예병을 이끌고 상주(尙州)에 내려가 적을 막도록 하였으나 패배했던 일을 들 수 있다(『선조실록』 25년 4월 17일). 이는 당시 지방군 운용 전술이었던 제승방략(制勝方略)에 의거해서 현지에서는 병력을 동원하고, 중앙에서 보낸 장수는 이들을 거느리고 출동해서 적을 공격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중앙에서 보내는 장수가 이일이었고 그의 직임이 순변사였다. 그러나 이일의 패배 이후에 연속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운영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원래의 목적에 의거해서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지속되었다.

참고문헌

  • 이원명·박상진, 『장양공 이일(李鎰) 장군 연구 -국역 ‘장양공전서(壯襄公全書)’-』, 국학자료원, 2010.
  • 이원명, 「조선중기 녹둔도 확보와 북병사 이일에 관한 고찰 -《장양공전서》(1893)을 중심으로-」, 『백산학보』 8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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