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직(金尙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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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초 태종(太宗)~세종(世宗)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부제학(副提學)과 형조 참의(參議) 등을 지냈다.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순흥부사(順興府使)를 지낸 김겸(金謙)이고, 할아버지는 김정(金鼎)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대에 호군(護軍)으로 종사한 김득화(金得和)이다. 주로 사간원(司諫院)과 집현전의 간관과 학사로 활동했다.

태종 시대 활동

김상직(金尙直)은 1405년(태종 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서 1위로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다.[『방목(榜目)』] 이후 오랫동안 사초를 집필하는 사관(史官)직에 머물렀고, 충주사고(忠州史庫)에 있는 서적들을 태종에게 바쳤다.(『태종실록』 12년 8월 7일) 1415년(태종 15)부터 사간원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간관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태종에게 강무(講武)의 정지를 간청하였고(『태종실록』 15년 2월 1일), 다른 간관들과 함께 대간(臺諫) 관원에 대한 이조의 인사평가를 금지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태종실록』 15년 8월 14일)

또한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안망지(安望之)∙사헌부 지평(持平)오영로(吳寧老) 등과 함께 외척인 민무회(閔無悔)∙민무휼(閔無恤)의 발언으로 촉발된 옥사의 관련자들을 엄벌할 것을 주장했다.(『태종실록』 15년 11월 15일) 1418년(태종 18) 교서관(校書館)교리(校理)가 된 후에도 김상직은 백성들에게 양잠을 알려주는 기관인 공상잠실(公桑蠶室)의 폐해를 지적하는 등 태종에게 정치적 조언과 건의를 지속했다.(『태종실록』 18년 7월 2일)

세종 시대 활동

세종 즉위 직후 김상직은 권맹손(權孟孫)∙김장(金廧)과 함께 병조 좌랑(佐郞)에 제수되었다.(『세종실록』 즉위년 8월 27일) 이듬해 집현전을 설치하면서 집현전 응교(應敎)로 발탁되었다.(『세종실록』 2년 3월 16일) 같은 해 명(明)나라 사신의 성균관 문묘 배알 때 가직강(假直講)이 되어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었고,(『세종실록』2년 4월 11일) 이듬해 세자로 책봉된 문종(文宗)에 대한 경전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관속(世子官屬) 좌문학(左文學)으로 임명되었다.(『세종실록』 3년 10월 26일) 또한 1423년(세종 5)부터 세종의 명으로 신장(申檣)어변갑(魚變甲)∙정인지(鄭麟趾)∙유상지(兪尙智) 등의 다른 집현전 관헌들과 함께 사관 업무를 겸임했다.(『세종실록』 5년 6월 24일)

1424년(세종 6)에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한 김상직은 이듬해인 1425년(세종 7) 집현전 부제학신장 등 12인과 함께 세종의 수령육기제(守令六期制)에 반대를 표명하고, 지방 수령의 임기를 30개월로 고정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세종실록』 7년 6월 27일) 이 수령육기제와 관련한 논의에는 당시 중앙 조정뿐만 아니라 삼사(三司), 집현전, 지방 수령 등이 모두 연관되었다. 그 경과 또한 호조 참판(參判)고약해(高若海)와 세종 간의 공익(公益) 대 사익(私益) 논쟁으로 이어질 정도로 심화되었다. 세종의 수령육기제 고집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신장과 김상직이 사직을 청하기도 했지만 반려되었다.(『세종실록』 7년 6월 27일)

이후 잠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으로 임명되어 세자 교육에 관여했던 김상직은 1426년(세종 8)에 집현전 부제학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 8년 3월 17일) 1431년(세종 13)부터는 육조로 자리를 옮겨 병조 참의 임명되었는데, 이때 병조의 당상관들이 화적과 관련한 상황 보고를 형조의 업무로 여겨 무시한 사건에 연루되어 국문을 받기도 했으나 곧 풀려났다.(『세종실록』 13년 4월 14일) 그로부터 한달 후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세종실록』 13년 5월 21일)

성품과 일화

김상직은 태종 때부터 주로 사관과 간관으로 활동했다. 1415년(태종 15) 이조의 간관 평가와 관련된 상소나 민무회∙민무휼에 대한 처벌 요청, 1425년(세종 7)의 수령육기제 반대 상소 등에 앞장섰다. 태종과 세종이 대간(臺諫) 및 집현전의 상소문에 대한 비답(批答)을 김상직을 통해 전달한 것만 보아도, 당시 대간 및 집현전 내에서 김상직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신장 등 집현전 학사 12인과 공동으로 올린 수령육기제 반대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곧바로 신장과 더불어 사직을 요청하며 항의하는 강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세종실록』 7년 6월 27일)

그밖에 1434년(세종 16)에 그의 아내 전의 이씨(全義李氏)가 다른 사족의 부인들과 함께 회암사(檜巖寺)경찬회(慶讚會)에 참여했다가 사헌부의 탄핵으로 속전(贖錢)을 바친 일이 있었으나, 김상직에게 영향이 미치진 않았다.

후손

부인 전의 이씨는 이웅(李雄)의 딸로 3남 1녀를 두었다. 1남은 김귀달(金貴達)이고, 2남은 김귀지(金貴知)이며, 3남은 김신지(金愼知)이다. 1녀는 박문규(朴文規)의 처이다.

한편 김상직의 6대손인 김홍민(金弘敏)과 김홍미(金弘微) 형제가 유명한데, 김홍민은 1570년(선조 3)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과 삼사의 관직을 거쳐, 1584년(선조 17) 이조 좌랑(佐郞)까지 올랐다. 김홍민의 동생인 김홍미는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사간원 사간(司諫)과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계곡집(谿谷集)』 권12 명류「유명조선국 통정대부 승정원좌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김공 묘갈명(有明朝鮮國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金公墓碣銘)」 ]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방목(榜目)』
  • 『계곡집(谿谷集)』
  • 배병삼, 「정치가 세종의 한 면모 : '수령육기제' 도입과 제도화 과정을 중심으로」, 『정치 사상연구』11,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