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춘란(權春蘭)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539년(중종34)∼1617년(광해군9) = 79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유학자. 자는 언회(彦晦)이고, 호는 회곡(晦谷)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권석충(權錫忠)의 아들이고, 권춘계(權春桂)의 형이다. 권춘계의 아들인 권태일(權泰一)을 양자로 삼았는데, 부자가 모두 이황(李滉) · 구봉령(具鳳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동인(東人) 유성룡(柳成龍) · 김성일(金誠一) 등과는 동문수학한 친구 사이인데, 김성일과는 사돈을 맺었다.

선조 시대 활동

35세이던 1573년(선조6)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가, 대교(待敎) · 봉교(奉敎)를 거쳐 사헌부 감찰(監察)로 승진하였다.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나갔다가 사간원 정언(正言) · 사헌부 지평(持平) 등 청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나서 사직하였다. 1587년(선조20) 부친상을 당하였고, 고향에서 3년 상을 마친 다음 직강(直講) · 헌납(獻納)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또 의성현령(義城縣令)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고향 안동에서 김윤명(金允明)의 의병에 가담하여 왜적과 싸웠다.

임진왜란 이후 은둔 생활

권춘란은 왜란의 참화(慘禍)를 겪으면서 당쟁(黨爭)만을 일삼는 조정에 나가서 벼슬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퇴계의 제자 가운데 관계의 진출을 기피하였던 영남학파의 중심인물이다. 1595년(선조28) 장령(掌令) · 필선(弼善) · 사간(司諫)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으며, 1597년(선조30) 장령 · 집의(執義) · 보덕(輔德) · 직강 · 사간 · 사예(司藝)에 임명되었을 때에도, 모두 사양하였다. 1601년(선조34) 4월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조정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부임했으나, 석 달 만에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604년(선조37) 성균관 직강 ·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1607년(선조40) 영천군수(永川郡守) ·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으나, 이번에는 나이가 많다고 부임하지 않았다.

세상의 일에 뜻이 없어 초야에 묻혀 글을 읽고 친구 유성룡 · 정구(鄭逑) 등과 성리학의 의심나는 분야를 토론하면서 즐겁게 살았다. 또 그는 스승 구봉령의 유문(遺文)을 교정하여 완성된 원고를 만들고, 구봉령을 모시는 주계서원(周溪書院)을 건립하는 데 앞장섰다. 저서로는 『진학도(進學圖)』 · 『공문언행록(孔門言行錄)』 · 『회곡집(晦谷集)』 등이 있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상도 안동(安東) 사니산(師尼山)에 있고,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스승 구봉령과 함께 경상도 안동 주계서원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백담집(栢潭集)』
  • 『퇴계집(退溪集)』
  • 『월천집(月川集)』
  • 『서애집(西厓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청음집(淸陰集)』
  • 『경연당집(景淵堂集)』
  • 『난중잡록(亂中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