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령(具鳳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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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6년(중종21)~1586년(선조19) = 61세].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 활동한 학자. 자는 경서(景瑞)이고, 호는 백담(柏潭), 규봉(圭峯)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경상도 안동(安東) 출신이다. 퇴계(退溪)이황(李滉)의 초기 문인(門人)인데, 그 문하에서 사간(司諫)권춘란(權春蘭) 등을 배출하였다.

명종 시대 활동

1560년(명종15)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1562년(명종17) 홍문관(弘文館)정자(正字)에 임명되었다. 그 뒤 1566년(명종21) 정시(廷試)에 장원하여 홍문관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윤원형(尹元衡)이 조정에서 위세를 떨쳤으므로, 그가 앞장서서 사림(士林)의 여론을 일으켜 그 비행을 공박하였다. 1566년(명종21) 병조좌랑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567년(명종22)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거쳐서 1567년(명종22) 홍문관부수찬(副修撰)이 되어,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같은 해 이조좌랑에 임명되어 실록청(實錄廳)의 직무를 겸임하였다. 그 뒤 전라도(全羅道) 지방에 암행어사(暗行御使)로 나가서 재상(災傷)을 점검하였는데, 그가 이르는 곳마다 교활한 관리나 백성들이 감히 조세를 포탈하지 못하였다.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 이조정랑에 임명되어, 사림파(士林派)가 동서로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편부당하게 인재를 등용하였으나, 오히려 양파로부터 비난만 받았다.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안동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안동에 은거하고 있던 이황은 시(詩)를 지어 그에게 보내어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고 격려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70년(선조3) 홍문관교리(敎理)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를 거쳐서 홍문관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1573년(선조6) 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이 되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과 홍문관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고, 승정원(承政院)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었다. 1574년(선조7)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어, 부임하러 가다가 병을 핑계하고 돌아오니, 선조(宣祖)가 다른 사람으로 교체시키고, 그를 이조참판에 임명하였다. 그는 전조(銓曹)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사림의 비난을 많이 받았으나, 자기 몸을 바르게 가지도록 노력하며, 사림의 여론을 질서 있게 단속하고, 동서의 당론을 중재하기 위해 애쓰면서 현명한 인물을 골라서 등용하였다.

동서 분당의 중재 노력

1575년(선조8) 심의겸(沈義謙)이 신진 사류 김효원(金孝元)과 반목하여 동서로 분당(分黨)할 때, 대사간(大司諫)이발(李潑)은 구봉령도 심의겸의 일당이라고 지목하여 헐뜯었다. 이에 선조는 심의겸의 관작을 삭탈하고, 그 죄명을 쓴 방문(榜文)을 조당(朝堂)에 내걸게 하면서, 구봉령과 정철(鄭澈) 등의 이름도 그 방문에 나란히 써서 ‘당인(黨人)’이라고 붙이게 하였다. 이리하여 사림파의 기세가 꺾이고 조야(朝野)의 분당 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구봉령은 ‘당인’이라는 낙인이 찍혔는데, 사실은 그가 일찍이 전라도 남평(南平)을 지나다가 한 번 이발에게 문안하지 않았던 때문에, 이발이 앙심을 품고 그를 배척하여 벼슬에서 내쫓았던 것이다. 그는 낙향하여 학업에 증진하고, 후진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 뒤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로 전임되었다가, 얼마 후 대사간과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80년(선조13) 다시 부제학으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사직하였으나, 선조가 윤허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간 지 5년만에 소명(召命)에 응하여 한 번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선조가 그를 붙들면서 “사직하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하였다.

사림파의 여론이 분열될 때 그는 중립을 지키고 한쪽으로 쏠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다가 도리어 이발에게 배척을 받았고, 이어서 당인으로 지목을 받게 되자, 이때부터 그는 관직에 제수되어도 일체 부임하지 않았다. 고향의 산곡간 호수가에 집을 지어 여러 서책(書冊)을 갖추어 놓고 제자들을 가르치니, 안동 사람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1586년(선조19) 7월 병으로 죽으니, 향년 61세였다.

그는 시문에 뛰어나고,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혼천의기(渾天儀記)」를 지었다. 저서에 『백담문집(栢潭文集)』과 그 속집(續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일찍이 안동에 있을 때 백담(栢潭)의 아름다운 경치를 사랑하여 그 곳에 오두막집을 지어놓고 만년을 여기에서 보냈다. 그가 죽은 뒤에 안동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여 사당을 세우고 향사(享祀)하였다. 또 서울에서 벼슬할 때 용산(龍山)의 산자락에 서재(書齋)를 지어놓고 학도(學徒)들에게 학문에 정진하는 서당(書堂)으로 쓰게 하였다.

구봉령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총명함은 남보다 뛰어나서 글을 읽을 때 눈으로 한 번 훑어보면 즉석에서 외워버렸다. 먼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하여 자세히 이해한 다음에 유교의 ‘6경(六經)’을 읽어서 그 요체를 파악하였다. 항상 침묵하며 겉으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퇴계이황의 초기 제자로서 가장 뛰어났으나, 세상에서 그를 아는 자가 적었다고 한다.

묘소와 제향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묘소는 경상도 안동 미도(味道)의 산기슭에 있는데, 그의 손서(孫壻) 이준(李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사후에 안동의 주계서원(周溪書院)과 서울의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계갑일록(癸甲日錄)』
  • 『석담일기(石潭日記)』
  • 『사계전서(沙溪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시정비(時政非)』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고봉집(高峯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우계집(牛溪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잠곡유고(潛谷遺稿)』
  • 『택당집(澤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