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수(姜台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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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79년(성종10)~1526년(중종21) = 48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자삼(子三)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인데, 좌찬성(左贊成)강희맹(姜希孟)의 손자이고 우의정(右議政)강귀손(姜龜孫)의 양아들이다. 모재(慕齋)김안국(金安國)과 절친한 사이였다.

중종 시대 활동

1511년(중종6)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 봉상시(奉常寺)주부(主簿)에 임명되었고, 공조좌랑, 예조좌랑· 예조정랑에 올랐으며, 교서관(校書館)교리(校理), 훈련원(訓練院)판관(判官), 봉상시(奉常寺)첨정(僉正), 광흥창(廣興倉)수(守), 예빈시(禮賓寺)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 생부 강학손(姜鶴孫)이 일찍이 관노비를 사점(私占)하였다가 전라도 영광(靈光)으로 귀양갔었는데, 그가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이 일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양부 강귀손(姜龜孫)의 도움으로 벼슬을 할 수 있었다. 그는 13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언제나 조심하고 게으르지 않았으며,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민첩하였고 자기가 맡은 일은 반드시 해결했다.

생부모가 연로하다고 지방 수령관을 자원하여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에 임명되었는데, 고을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높았다. 얼마 뒤에 생부 강학손의 상을 당하고 다음해에 생모 신씨의 상을 당하자, 전라도 영광에서 여묘살이를 오랫동안 하다가 몸의 건강을 해쳐서, 1526년(중종21) 상중(喪中)에 몸이 쇠약해져서 죽으니, 나이가 48세였다.

성품과 일화

어려서부터 김안국(金安國)과 같이 자라면서 함께 공부했는데, 서로 형제 같이 친하게 지냈다. 일찍이 두 사람은 아들딸을 혼인시키자고 약속했는데, 나중에 그 약속대로 강태수의 아들 강복(姜復)과 김안국의 외동딸이 혼인하였다.

강태수의 자질은 이미 남보다 빼어났는데, 일찍이 가풍(家風)을 이어받아 문학에 힘써 마침내 문장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일찍이 백부 우의정강귀손(姜龜孫)에게 양자로 갔는데, 양부 강귀손이 죽자 양모를 더욱 잘 섬겼으며, 여러 형제자매와 재산을 분배하는 데에도 적자(嫡子)라고 자처하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나누어 주어, 양부의 뜻을 그대로 따랐다. 친구와 사귀는 데에도 신의(信義)를 매우 중시하였다.

묘소와 비문

전라도 영광에서 관을 옮겨와서 경기도 안산(安山) 직곶리(職串里)의 선영에 장사지냈는데, 친구 김안국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야언(海東野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