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江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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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강변에 위치한 군자감 소속 세곡창고(稅穀倉庫).

개설

조선시대 군현에서 거두어 올린 전세곡은 광흥창, 군자창, 풍저창에 각기 보관되었다. 이 중 군자창은 광통교에 본감 창고를 두고, 송현에 별창과 용산 강변에 강창을 따로 두었다. 이를 일컬어 군자 3감이라고 한다. 강감(江監)은 이때의 강창을 지칭한다. 조선후기 들어 군자본감과 분감 창고는 폐지되었지만 용산강감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392년(태조 1) 군자감이 설치될 당시 분감과 강감이 함께 설립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나 개국 초기 군대 양식을 마련하는 군자위전(軍資位田), 즉 군자전이 증가함에 따라 이를 관리할 분감이 추가로 설치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볼 수 있다.

조선초기에는 각사자판(各司自辦)의 원리에 따라 개별 관서에서 위전(位田)공해전(公廨田)을 두고 고유 업무에 따른 공적 경비와 관서 유지비용을 충당하였다. 군자위전은 이러한 각사위전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다. 고려 말 전제개혁 과정에서 새로이 파악된 토지를 대부분 군자전에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1410년(태종 10) 당시 군자전은 4만여 결에 이르렀다. 정부에서는 수조지를 분급하거나 회수할 때 이렇게 확보한 군자전을 활용하였다. 한편 군자전에서 거둔 전세는 군량비축 외에 각사의 경비를 보조해 주기 위한 예비비 형태로 운영하였다. 1445년(세종 27) 국용전제(國用田制)가 시행되면서 각사에 분급한 수조지를 호조에 귀속시키고 국용전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이에 군자감에 비축된 곡식도 국고곡(國庫穀)의 형태로 전환되어, 중앙 각사의 부족한 경비와 진휼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조직 및 역할

군자감은 군수 물자의 비축을 담당하던 정3품 아문이다. 『경국대전』상의 직제를 살펴보면, 도제조와 제조 각 1인, 정(正) 1인, 부정(副正) 1인, 첨정(僉正) 2인, 판관(判官) 1인, 주부(主簿) 3인, 직장(直長) 1인, 봉사(奉事) 1인, 부봉사(副奉事) 1인, 참봉(參奉) 1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속대전』이 간행될 무렵 본감과 분감이 폐지되고 관원 수도 줄어드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조선후기 군자감의 위상은 조선전기에 비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변천

조선후기 군자감은 군자위전이나 국고곡을 관리하던 이전 시기와 달리, 주로 액정서(掖庭署) 소속 장교(將校)와 이예(吏隸), 공장(工匠) 등의 급료를 지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1867년(고종 4)에 간행된 『육전조례』를 통해서도 재차 확인된다. 『육전조례』호전(戶典)조에 실린 군자감 항목을 살펴보면, 군자감에서 각 도의 전세를 4소장(所掌)에서 나누어 받아 창고에 수납한 뒤 호조의 지시에 따라 매달 구실아치들의 급료인 요미를 지급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때 군자감에서 지급한 요미는 쌀 2만 석, 좁쌀 2천 석, 콩 8천 석가량으로 집계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육전조례(六典條例)』
  • 강제훈, 『조선초기 전세재정 연구-국고곡의 확보와 운용』,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 오정섭, 「고려말·조선초 각사위전을 통해서 본 중앙재정」, 『한국사론』27, 1992.
  • 이장우, 「조선초기 군자전에 대한 일고찰」, 『역사학보』118,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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