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기록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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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가 [[곤룡포]]를 들고 지붕으로 올라고 복을 했다. 승하한 다음날인 6월 29일 [[목욕]]하고 [[습]]과 [[소렴]]을 행했다. 7월 2일 영상을 [[창경궁 환경전]]으로 옮겨 빈전을 차리고 [[대렴]]을 거행했다. 7월 4일 [[종친]]과 [[백관]]이 [[성복]]을 했다. [[성복]]을 마치자 [[왕세자]](훗날 순조)가 [[왕의 대례복]]을 입고 [[창경궁 환경]]전에 나아가 [[대보]]를 받고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한 다음 편전인 [[창덕궁 희정당]]으로 가서 [[대왕대비]]에 오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는 의식을 치렀다. [[적의]]를 입은 [[대왕대비]]가 [[창덕궁 희정당]] 동쪽 근처에서 남향하여 앉고 그 앞 기둥에 발을 쳤다. [[순조]]는 발을 두리운 바깥쪽 서편에 가서 남향하고 앉았다. 수렴청정은 [[왕]]이 15세가 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 관례이다. [[정조]]의 [[발인]]은 11월 3일에 거행되어 11월 6일에 [[건릉|건릉(健陵)]]<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2060000,31 화성 융릉과 건릉]",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에 안장되었는데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모셔져 있는 [[현륭원]] 동쪽이었다. [[화성행궁]]에서 [[우제|초우제]]를 지내고 11월 7일 시흥행궁에서 [[우제|재우제]]를 지내고, [[창덕궁 신정전]]으로 신주를 모시고 왔다. 그러나 건릉이 풍수상 문제점이 드러나 1821년(순조 21)에 [[건릉]]을 [[현륭원]] 서편으로 다시 옮겨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 책에는 40면의 [[발인]][[반차도]]가 실려있고, 국장에 쓰인 [[대여]]를 비롯한 [[방상씨]]와 [[상복]] 등이 그려져 있다.<ref>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440~44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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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진, 『왕의 죽음, 정조의 국장』, 글항아리, 2015.
 
* 이현진, 『왕의 죽음, 정조의 국장』, 글항아리, 2015.
 
* 이현진, 『조선 왕실의 상장례』, 신구문화사, 2017.
 
* 이현진, 『조선 왕실의 상장례』, 신구문화사, 2017.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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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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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일 (월) 16:32 판


정조국장도감의궤
(正祖國葬都監儀軌)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의궤(http://kyujanggak.snu.ac.kr/center/main/main.jsp)
대표명칭 정조국장도감의궤
한자표기 正祖國葬都監儀軌
주제 흉례(凶禮)
작성주체 국장도감(國葬都監)
의례담당자 이시수(李時秀)
작성지역 한성부
작성시기 1800년(순조 즉위년)
소장처(원소장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오대산)
판본 필사본
표기문자 한자, 이두
수량 총 4책 744장(제1책 159장, 제2책 216장, 제3책 208장, 제4책 161장)
크기 45.8×33.0
도설 100면(제2책 45면, 제3책 51면, 제4책 4면)(채색)
반차도 40면(제2책)(채색)
총 길이: 약 1,320㎝



정의

1800년(정조 24) 정조(正祖)의 장례를 치르는 국장(國葬)[1]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내용

1800년(정조 24) 6월 28일 정조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왕세자(훗날 순조)가 15세가 되는 1804년에 스스로 왕위를 왕세자에게 물려주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자신이 건설한 화성행궁에서 여생을 보내려는 정조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정조의 죽음에 대해서 영남 남인들 사이에는 노론벽파에 의한 독살설이 널리 퍼져있었다. 정조는 평소에 건강한 편이었는데, 승하하기 18일 전인 6월 10일부터 종기가 났음을 신하들에게 알리고 고름을 빼는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병은 점점 악화되었고, 은 화병 때문이라고 했다. 여러가지 약을 바르고 약첩을 먹어도 효과가 별로 나타나지 않고 은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창경궁 영춘헌에 들러 김조순 등을 접견하다가 도중에 병세가 악화되어 말을 잇지 못하고 오후 6시경 숨을 거두었다. 정조의 국장은상례보편(喪禮輔編)에 의거해 거행되었다. 국장의 비용은 국비를 써서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정조 생전의 방침에 따라 내탕금에서 지출하라고 왕대비가 지시했다.[2]

내시가 곤룡포를 들고 지붕으로 올라고 복을 했다. 승하한 다음날인 6월 29일 목욕하고 소렴을 행했다. 7월 2일 영상을 창경궁 환경전으로 옮겨 빈전을 차리고 대렴을 거행했다. 7월 4일 종친백관성복을 했다. 성복을 마치자 왕세자(훗날 순조)가 왕의 대례복을 입고 창경궁 환경전에 나아가 대보를 받고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한 다음 편전인 창덕궁 희정당으로 가서 대왕대비에 오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는 의식을 치렀다. 적의를 입은 대왕대비창덕궁 희정당 동쪽 근처에서 남향하여 앉고 그 앞 기둥에 발을 쳤다. 순조는 발을 두리운 바깥쪽 서편에 가서 남향하고 앉았다. 수렴청정은 이 15세가 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 관례이다. 정조발인은 11월 3일에 거행되어 11월 6일에 건릉(健陵)[3]에 안장되었는데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모셔져 있는 현륭원 동쪽이었다. 화성행궁에서 초우제를 지내고 11월 7일 시흥행궁에서 재우제를 지내고, 창덕궁 신정전으로 신주를 모시고 왔다. 그러나 건릉이 풍수상 문제점이 드러나 1821년(순조 21)에 건릉현륭원 서편으로 다시 옮겨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 책에는 40면의 발인반차도가 실려있고, 국장에 쓰인 대여를 비롯한 방상씨상복 등이 그려져 있다.[4]

목록

제1책: 목록(目錄), 좌목(座目), 승전부주계(承傳附奏啓), 장계(狀啓), 이문질(移文秩), 내관질(來關秩), 예관(禮關), 의주(儀註), 품목질(稟目秩), 감결질(甘結秩), 물력(物力), 상전질(賞典秩), 의궤(儀軌)
제2책: 일방(一房), 이방(二房)
제3책: 삼방(三房), 부전(附箋)
제4책: 우주소(虞主所), 지석소(誌石所), 별공작(別工作), 분장흥고(分長興庫), 분전설사(分典設司)

해제

이혜정, "정조국장도감의궤", 의궤 검색, 『의궤 종합정보』online,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판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강화부본(奎 1363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조국장도감의궤 정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조국장도감의궤 순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조국장도감의궤 곤룡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조국장도감의궤 왕의 대례복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조국장도감의궤 상례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정조국장도감의궤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정조국장도감의궤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정조국장도감의궤 목욕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정조국장도감의궤 소렴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정조국장도감의궤 대렴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정조국장도감의궤 성복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정조국장도감의궤 발인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정조국장도감의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시간정보

시간 내용
1800년 6월 28일 정조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1800년 6월 29일 정조의 시신을 목욕시켰다
1800년 6월 29일 정조의 시신을 소렴했다
1800년 7월 2일 정조의 시신을 대렴했다
1800년 7월 2일 정조의 시신을 성빈했다
1800년 7월 4일 종친백관들이 성복했다
1800년 11월 3일 정조의 시신을 발인했다
1800년 『정조국장도감의궤』가 편찬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213759 126.9869674 사적 제206호인 건릉(健陵)은 정조효의왕후의 무덤이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주석

  1.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이라하며, 왕세자와 왕세자빈 이하는 '예장(禮葬)'이라 한다.
  2.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437~441쪽.
  3. 화성 융릉과 건릉",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4.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440~442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국립문화재연구소, 『정조국장도감의궤』, 민속원, 2005.
  • 김문식, 신병주 저,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분류별의궤해설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의궤 해제집(3)』,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2.
  • 이현진, 『왕의 죽음, 정조의 국장』, 글항아리, 2015.
  • 이현진, 『조선 왕실의 상장례』, 신구문화사, 2017.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더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