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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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思悼世子)
대표명칭 사도세자
한자표기 思悼世子
생몰년 1735년 1월 21일-1762년 윤5월 21일(음)
이칭 장헌세자(莊獻世子)
시호 의소(懿昭)
선(愃), 의재(毅齋)
윤관(允寬)
시대 조선
대표직함 왕세자, 추존왕, 추존황제
배우자 정비 혜경궁 홍씨

후궁 숙빈 임씨(肅嬪 林氏)
후궁 경빈 박씨(景嬪 朴氏)

후궁 수칙 이씨(守則 李氏)
영조(英祖)
생모 영빈 이씨(暎嬪 李氏) 법모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자녀 5남 3녀, 의소세손(懿昭世孫), 정조(正祖), 청연공주(淸衍公主), 청선공주(淸璿公主)
능묘 융릉(隆陵), 37.211512, 126.9926467
성격 인물
유형 왕세자



정의

영조의 차자로, 정조의 아버지이다.

내용

생애

1735년(영조 11)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으며,[1] 다음해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2] 1744년 혜경궁 홍씨와 가례(嘉禮)를 거행하였다.[3] 1749년(영조 25년)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4] 대리청정기간에 영조사도세자를 질책하는 일이 많았으며, 이때 사도세자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 주위의 내시나 궁녀를 죽이기도 하였다. 사도세자를 보호하던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죽자 영조사도세자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나경언(羅景彦)왕세자의 잘못을 논하는 상소를 올린 뒤, 나경언은 처형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 또한 1762년(영조 38)에 폐세자가 되어 뒤주에 갇혀 죽었다.[5]

사후

정조장헌세자로 추숭하였으며, 고종(高宗)장종으로 추존되었다가,[6] 장조로 추존되었다.[7] 묘인 영우원(永祐園)은 양주 배봉산에 있었는데, 정조가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고 정조도 죽은 뒤 이 인근에 안장되었다. 고종(高宗)이 1899년 장헌세자장종으로 추숭할 때 융릉이 되었다. 융릉은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에 있다. 1970년 5월 26일 건릉(健陵)과 함께 사적 제 206호로 지정되었다. [8]

거행 의례

사도세자책례도감의궤[9], 사도세자가례도감의궤

지식 관계망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영조 사도세자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사도세자 왕세자 A는 B에 해당한다 A dcterms:type B
사도세자 책례 A는 B를 거행하였다 A ekc:participates B
사도세자 가례 A는 B를 거행하였다 A ekc:participates B

시간정보

시간 내용
1736년 3월 15일 사도세자왕세자 책례를 거행하였다
1744년 1월 11일 사도세자왕세자 가례를 거행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79442 126.991026 창덕궁 인정전에서 사도세자왕세자 책례를 거행하였다
37.579442 126.991026 창덕궁 인정전에서 사도세자가례를 거행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英祖實錄』 11년(1735) 1월 壬辰: 「暎嬪李氏誕生元子于集福軒」
  2. 『英祖實錄』 12년(1736) 3월 己酉: 「午時上出御仁政殿」
  3. 『英祖實錄』 20년(1744) 1월 己丑: 「是日行王世子嘉禮」
  4. 『英祖實錄』 25년(1749) 1월 丙子: 「以王世子代理」
  5. 『英祖實錄』 38년(1762) 윤5월 癸未: 「思悼世子薨逝」; 김문식,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문헌과 해석』 45, 태학사, 2008, 57~63쪽.
  6. 『高宗實錄』 36년(1899) 8월 3일(양력): 「特進官徐相祖疏略」
  7. 『高宗實錄』 36년(1899) 12월 23일(양력): 「二十三日御中和殿受賀頒赦」
  8. 화성 융릉", 문화재 검색, 『문화재청』online, 문화재청.
  9. "사도세자책례도감의궤", 의궤 검색, 『규장각』online,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0. 화성 융릉", 문화재 검색, 『문화재청』online, 문화재청.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고종실록』
  • 『영조실록』
  • 『정조실록』
  • 김문식,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문헌과 해석』 45, 태학사, 2008.
  • 김용숙, 「思悼世子의 悲劇과 그의 精神分析學的 考察 : "한중록"硏究」, 『국어국문학』 19, 국어국문학회, 1958.
  • 김준혁, 「사도세자의 武藝 인식과 정책」, 『중앙사론』 37, 한국중앙사학회, 2013.
  • 이완우, 「장서각 소장 장헌세자(莊獻世子) 예필진적(睿筆眞蹟)」, 『정신문화연구』 36-4,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 정병설, 「사도세자가 명해서 만든 화첩」, 『문헌과 해석』 47, 태학사, 2009.
  • 鄭恩任, 「『閑中錄』에 나타난 實記文學的 性格 Ⅴ: 사도세자의 생애를 중심으로」, 『논문집』 34-1, 강남대학교, 1999.
  • 정해득, 「『한중록』의 집필목적과 그 영향」, 『朝鮮時代史學報』 74, 조선시대사학회, 2015.
  • 지두환, 『영조대왕과 친인척』 1, 역사문화, 2009.
  • 최성환, 「사도세자 추모 공간의 위상 변화와 영우원(永祐園) 천장」, 『朝鮮時代史學報』 60, 조선시대사학회, 2012.
  • 최옥환, 「思悼世子의 罪와 罰」, 『전북사학』 24, 전북사학회, 2001.

더 읽을거리

  • 이재범, "장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지영, "사도세자",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