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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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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년(현종 즉위) [[효종|효종(孝宗)]]의 장례를 치르는 국장(國葬)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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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년(조선 현종 즉위) [[효종|효종]]의 장례를 치르는 국장(國葬)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내용'''==
 
=='''내용'''==
[[효종]]은 1659년(효종 10) 5월 4일 오시(午時)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韓氏)의 둘째 아들로, 인조반정 후 [[인조|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8년 만에 돌아왔다. 1645년(인조 23)에 먼저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인조]]와 갈등을 일으키다 두 달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 [[인조|봉림대군]]이 [[왕세자]]가 되었다.<ref>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115쪽.</ref> [[왕]]은 종기 때문에 부기가 생기는 병을 앓았는데, 의관들이 산침(散鍼)을 놓아 부기를 빼는 치료를 계속했다. 1659년(효종 10) 5월 4일 [[왕]]은 편전에 나가지 못하고 [[창덕궁 대조전]]에서 침을 맞았는데, 침이 혈관을 찔러 피를 계속 흘리다가 숨을 거두게 되었다. [[왕]]이 숨을 거두자 사관이 '대점(大漸)'이라는 두 글자를 써 밖에 내보여 [[효종]]의 승하를 알렸다. 내시가 [[곤룡포]]를 들고 지붕으로 올라고 [[복|복(復)]]을 한 다음 [[습]]을 했다. 5월 6일 [[소렴|소렴(小殮)]]을 행하고 5월 8일 빈전인 [[창덕궁 선정전]]으로 옮긴 다음 [[대렵|대렴(大殮)]]을 했다. 5월 9일에 상복을 입는 [[성복|성복(成服)]]을 행한 다음 [[왕세자]]는 옷을 갈아입고 즉위식을 거행했다. [[효종]]의 국장은 5개월장을 치러 10월 28일 [[발인]]하여 10월 29일 지금의 동구릉 자리에 있는 [[영릉|영릉(寧陵)]]<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1950000,31 영릉(寧陵)]",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에 안장되었는데 1673년(현종 14)에 석물에 금이 가는 등 문제가 발생하여 지금의 여주시로 천장했다. [[효종]]의 국장은 [[왕대비]]인 [[장렬왕후|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간에 [[기해예송|기해예송(己亥禮訟)]]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을 누르고, 1년복을 지지한 [[송시열|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와 같이 논란이 많던 국상을 치르고 [[효종]]의 신주를 [[창경궁 문정전]]에 봉안하였다.<ref>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141~14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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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은 1659년(효종 10) 5월 4일 오시(午時)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韓氏)의 둘째 아들로, 인조반정 후 [[인조|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8년 만에 돌아왔다. 1645년(인조 23)에 먼저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인조]]와 갈등을 일으키다 두 달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 [[인조|봉림대군]]이 [[왕세자]]가 되었다.<ref>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115쪽.</ref> 1649년 왕위에 올라 10년만에 병중에 들었다. [[왕]]은 종기 때문에 부기가 생기는 병을 앓았는데, 의관들이 산침(散鍼)을 놓아 부기를 빼는 치료를 계속하였다. 1659년(효종 10) 5월 4일 [[왕]]은 편전에 나가지 못하고 [[창덕궁 대조전]]에서 침을 맞았는데, 침이 혈관을 찔러 피를 계속 흘리다가 숨을 거두었다. 사관이 '대점(大漸)'이라는 두 글자를 써 밖에 내보여 [[효종]]의 승하를 알렸다. 내시가 [[곤룡포]]를 들고 지붕으로 올라 [[복|복(復)]]을 한 다음 [[습]]을 하였다. 5월 6일 [[소렴|소렴(小殮)]]을 행하고 5월 8일 빈전인 [[창덕궁 선정전]]으로 옮긴 다음 [[대렵|대렴(大殮)]]을 하였다. 5월 9일에 상복을 입는 [[성복|성복(成服)]]을 행한 다음 [[왕세자]]는 옷을 갈아입고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효종]]의 국장은 5개월장으로 치러졌다. 10월 28일 [[발인]]하여 10월 29일 지금의 동구릉 자리에 있는 [[영릉|영릉(寧陵)]]<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1950000,31 영릉(寧陵)]",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에 안장되었는데 1673년(현종 14)에 석물에 금이 가는 등 문제가 발생하여 지금의 여주시로 천장하였다. [[효종]]의 국장 과정에서 [[왕대비]]인 [[장렬왕후|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간에 [[기해예송|기해예송(己亥禮訟)]]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을 누르고, 1년복을 지지한 [[송시열|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와 같이 논란이 많던 국상을 치르고 [[효종]]의 신주를 [[창경궁 문정전]]에 봉안하였다.<ref>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141~14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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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6일 (토) 01:04 기준 최신판


효종국장도감의궤
(孝宗國葬都監儀軌)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http://uigwe.museum.go.kr)
대표명칭 효종국장도감의궤
한자표기 孝宗國葬都監儀軌
주제 흉례(凶禮)
작성주체 국장도감(國葬都監)
의례담당자 심지원(沈之源)
작성지역 한성부
작성시기 1659년(현종 즉위년)
소장처(원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어람용
규장각한국학연구원(강화부)
판본 필사본
표기문자 한자, 이두
수량 어람용: 총 2책 515장(상책 293장, 하책 222장)
강화부: 총 2책 471장(상책 259장, 하책 212장)
크기 어람용: 48.9×35.9
강화부: 45.9×33.5
도설 37면(상책 9면, 하책 28면)(채색)
반차도 어람용: 30면(상책)(채색)
총 길이: 약 1,080㎝
강화부: 26면(상책)(채색)
총 길이: 약 884㎝



정의

1659년(조선 현종 즉위) 효종의 장례를 치르는 국장(國葬)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내용

효종은 1659년(효종 10) 5월 4일 오시(午時)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인조인열왕후 한씨(韓氏)의 둘째 아들로, 인조반정 후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병자호란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8년 만에 돌아왔다. 1645년(인조 23)에 먼저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인조와 갈등을 일으키다 두 달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 봉림대군왕세자가 되었다.[1] 1649년 왕위에 올라 10년만에 병중에 들었다. 은 종기 때문에 부기가 생기는 병을 앓았는데, 의관들이 산침(散鍼)을 놓아 부기를 빼는 치료를 계속하였다. 1659년(효종 10) 5월 4일 은 편전에 나가지 못하고 창덕궁 대조전에서 침을 맞았는데, 침이 혈관을 찔러 피를 계속 흘리다가 숨을 거두었다. 사관이 '대점(大漸)'이라는 두 글자를 써 밖에 내보여 효종의 승하를 알렸다. 내시가 곤룡포를 들고 지붕으로 올라 복(復)을 한 다음 을 하였다. 5월 6일 소렴(小殮)을 행하고 5월 8일 빈전인 창덕궁 선정전으로 옮긴 다음 대렴(大殮)을 하였다. 5월 9일에 상복을 입는 성복(成服)을 행한 다음 왕세자는 옷을 갈아입고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효종의 국장은 5개월장으로 치러졌다. 10월 28일 발인하여 10월 29일 지금의 동구릉 자리에 있는 영릉(寧陵)[2]에 안장되었는데 1673년(현종 14)에 석물에 금이 가는 등 문제가 발생하여 지금의 여주시로 천장하였다. 효종의 국장 과정에서 왕대비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간에 기해예송(己亥禮訟)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을 누르고, 1년복을 지지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와 같이 논란이 많던 국상을 치르고 효종의 신주를 창경궁 문정전에 봉안하였다.[3]

목록

상책: 좌목(座目), 계사(啓辭), 분정별단(分定別單), 이문(移文), 품목(稟目), 감결(甘結), 예관(禮關), 일방(一房)
하책: 이방(二房), 삼방(三房), 별공작(別工作), 분전설사(分典設司), 분장흥고(分長興庫), 지석소(誌石所), 우주소(虞主所)

해제

송지원, "효종국장도감의궤(상)", 의궤 검색, 『외규장각 의궤』online, 국립중앙박물관.

"효종국장도감의궤(하)", 의궤 검색, 『외규장각 의궤』online, 국립중앙박물관.

"효종국장도감의궤", 의궤 검색, 『의궤 종합정보』online,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판본

국립중앙박물관: 어람용(2555), (255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강화부본(奎 13527), 의정부본(奎 1486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효종국장도감의궤 효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효종국장도감의궤 현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효종국장도감의궤 곤룡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효종국장도감의궤 왕의 대례복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효종국장도감의궤 상례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효종국장도감의궤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효종국장도감의궤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효종국장도감의궤 목욕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효종국장도감의궤 소렴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효종국장도감의궤 대렴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효종국장도감의궤 성복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효종국장도감의궤 발인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효종국장도감의궤 국립중앙박물관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효종국장도감의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시간정보

시간 내용
1659년 5월 4일 효종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1659년 5월 4일 효종의 시신을 목욕시켰다
1659년 5월 6일 효종의 시신을 소렴했다
1659년 5월 8일 효종의 시신을 대렴했다
1659년 5월 9일 종친백관들이 성복했다
1659년 10월 28일 효종의 시신을 발인했다
1659년 효종국장도감의궤가 편찬되었다

공간정보

  • 효종의 국장 장소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주석

  1.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115쪽.
  2. "영릉(寧陵)",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3.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 141~142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국립문화재연구소, 『정조국장도감의궤』, 민속원, 2005.
  • 김문식, 신병주 저,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분류별의궤해설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규장각소장 의궤 해제집(3)』,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2.
  • 이현진, 『왕의 죽음, 정조의 국장』, 글항아리, 2015.
  • 이현진, 『조선 왕실의 상장례』, 신구문화사, 2017.
  •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국가의례와 그 기록』, 일지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