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민 1차
목차
논문개요
논문 제목(교수님 제안)
1929년 조선박람회의 재현을 위한 메타 아카이브 구현
목차
- 서론
- 연구 목적 및 배경
- 연구대상
- 연구방법
- 대상 자원 분석 및 선행 연구
- 조선박람회(인문학적 연구)
- 조선박람회 기록물 현황
- 국가기록원
- 국립중앙도서관
- 전국 박물관 소장품
- 조선박람회 메타아카이브 구현
- 데이터 수집 및 정리
- 온톨로지 설계 및 구축
- 데이터 및 아카이브 활용
- 결론
- 참고문헌
개념 및 용어정리
※인문정보학과 석사학위 논문 김현규, 3.1운동에 관한 개방적 연계데이터 구축, 2018 다수 참고.
논문 지도(학위논문 작성시 유의사항)
1차 피드백(2020.07.01)
Ⅰ. 서론
1. 연구 목적 및 배경
연구배경: 흩어져 있는 조선박람회 기록물과 관련 지식세계
조선박람회라는 지식세계를 포괄하는 통합된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의 필요성 -> 김현 교수님이 제시한 메타아카이브 개념을 적용하여 전국에 개별 기관에 흩어져 보과되어 있는 '조선박람회(1929)'관련 기록물의 디지털아카이브 구축
연구목적: 조선박람회 기록물의 통합 아카이브 구축 및 활용 연구
- 개별기관에 흩어진 조선박람회 기록물의 통합 아카이브[메타아카이브] 구현
- 모두 각기 다른 사이트에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유관한 정보들끼리 한데 모아서 열람하는데 제한이 있음.
- 조선박람회의 실체를 전자상으로 복원; 이때 주제, 공간, 시간 값의 메타데이터를 활용해 조합하여 데이터베이스화
- 구체적인 형태는 시맨틱데이터베이스 구축을 통한 '전자지도'.
- 문헌(문서) 단위가 아닌 데이터 단위의 아카이브 모델 제안-> "시맨틱웹"
※ 문서 단위 웹 VS 데이터 단위 웹 [1]
| 문서 단위의 연결 | 데이터 단위의 연결 |
|---|---|
| 구체적인 개념들 간의 관계를 사람만 읽고 이해할 수 있음 | 기계가독형// 데이터와 데이터를 의미적 연관성에 따라 연결 |
| '조선박람회'에 관한 지식들이 문서 상의 텍스트로만 존재 | 웹에서 개별 페이지가 주소를 갖듯, 데이터의 웹에서는 하나의 개체가 다른 개체로부터 유일하게 식별될 수 있도록 하는 고유의 주소를 갖는다. |
예시: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조선박람회기념사진첩 "문헌 단위가 아닌, 문헌 안에 있는 '내용'을 데이터로 쪼개어 유관한 지식요소끼리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
2. 연구 대상
조선박람회의 기획과 개최, 운영과 정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요소를 추적할 수 있는 기록물 및 연구논저를 대상으로 함.
조선박람회 운영주최 측의 개회 및 운영 경위에 관한 기록물
① 총독부 기관지: 조선총독부 관보[2], 경성일보, 매일신보[3] 등
② 총독부 공식 간행물: 『조선박람회기념사진첩(1930)』[4], 『(조선박람회)경성협찬회보고서』[5]
③ 조산박람회 건축조감도, 배치도 등 [6]
④ 조선박람회 안내서, 팸플릿: 『경성편람(1929)』[7]
⑤ 그외 조선박람회 관련 선전포스터, 광고, 엽서 등의 시각매체 자료[8]
민간기록물
- 민간언론: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등
js1929_Press data
- 잡지: 『별건곤』
3. 연구 방법
3.1 전자지도 위에 표현할 콘텐츠설계
전자지도의 기본 3요소 : ①주제(내용) ②공간 ③시간
- 주제:
a. 박람회 출품물 b. 박람회 개최 운영과 관계된 인물 및 단체(조직) c. 박람회 출품 기업(대부분이 일본기업;웹 자원과 연결)
그 외 박람회 기록물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 요소
js1929_Contextual Data
- 공간: 박람회장 내 공간(전시관) + 경성역 ~ 숭례문 ~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경성시가지
- 시간: 박람회 개최를 전후로 일어난 사건 사고(법원 기록물 및 신문기사를 토대로)
+ 박람회 기간 동안 일어난 각종 행사 및 이벤트
js1929_Temporal Data
3.2 설계된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DB설계
1) 조선박람회 관련 선행연구 및 콘텐츠 현황 분석
2) 데이터 수집 및 정리
- 웹상의 각 개별 기관에서 해당 데이터에 관해 제공하는 정보를 모두 수집</br>
- MS-Excel 이용
- 데이터 저장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인 MS-SQLserver 사용
- 유형별 데이터 정리
- 조선박람회와 관련한 '공간(전시관)-시간(사건)-주제(인물,단체)-웹 자원'데이터를 수집하고 정리
- 온톨로지 설계
- 데이터를 분류하고 연계하기 위한 기술 체계로, 일반적으로 클래스- 속성- 관계성 설계 순을 따른다.
ⓐ 클래스 설계
클래스 분류는 헌국문화 엔사이브 온톨로지(EKC) 참고
ⓑ 속성설계
- 클래스에 속하는 각 개체들이 갖고 있는 특질적인 정보를 기술해주기 위한 틀
- 클래스별 속성의 종류 선정은 데이터 수집과정에서 대부분 완료
- 설계과정에는 속성을 기술하는 구체적 어휘 부여
- 속성의 기술체계는 RDF형식을 따름
- 속성 설계에서는 RDF 형식에서 데이터와 데이터값을 연결하는 서술 어휘(관계어)를 정의해주어야 한다.
EX) 손병희 - 태어나다(birth)-1861년
ⓒ 관계성 설계
- 개체와 개체간 관계에 대한 정보 기술
- 관계의 종류를 체계화하고 이를 나타내는 서술 어휘를 정의하는 작업
- RDF형식에서 Object Property에 해당(데이터와 데이터를 연결해주는 속성)
※'속성'과 '관계성'의 차이
| Datatype Property(속성) | Object Property(관계성) |
|---|---|
| 데이터와 데이터의 속성인 데이터 값을 연결 | 데이터와 데이터를 특정한 관계로 연결 |
| 속성(Attribute)에 해당 | 관계성(Relation)이 이에 해당 |
3.3 웹기반 서비스 구현(위키 플랫폼 활용)
- 데이터베이스 구축
한양도성 타임머신 빅데이터 편찬연구 데이터모델 참고
- 전자지도 구현 예시
조선왕조 태실 데이터 세슘지도
- 교수님께서 참고하라고 하심.
Ⅱ. 대상 자원 분석 및 선행 연구
Ⅱ.1 일제의 박람회 개최와 목적
1920년대는 ‘박람회의 시대'라 할 만큼 크고 작은 군소박람회가 범람하는 시대였다. 상품간의 우열을 따져 품평하는 소규모의 박람회격인 바자회, 장려회부터 가정박람회, 수산박람회, 기차박람회에 이르기까지 당대 산업의 특색과 계몽적 성격을 띤 박람회가 전국각지에서 개최되었다. 이처럼 박람회는 백화점, 박물관 등과 함께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시각문화의 한 축으로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9]
일제는 1929년, 조선을 강점한지 20년이 되는 해에 박람회라는 거대한 시각적 이벤트를 통해 그간의 통치성과를 기념하고 선전하고자했다. 요컨대 박람회를 통해 비문명국이었던 조선이 일본의 지배로 인해 문명화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지배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하고자 했다. 그간 조선박람회에 대한 연구는, 일제가 지배자로서 식민지 권력을 어떻게 표상하고, 그 안에서 식민지화 전후의 상황이 전시라는 장치를 통해 전략화 되었는지 그 안의 식민주의를 밝히는 작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러한 선전이 당대의 조선의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이었는지를 지적하기도 했다. [10] 즉 일반적인 박람회의 개최가 상품을 전시하여 생산 및 소비지형의 판도를 넓히는 식산흥업에 1차적 목적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가 ‘시정 20주년 기념’이라는 정치적 기획에서 출발하였음은 이미 많은 연구논저를 통해 밝혀진 바이다.[11]
조선박람회가 그간 개최되었던 기존의 박람회와 갖는 차이점은 그 단위가 일반적인 단체, 시, 도에서 벗어나 국가단위에서 개최되어 압도적인 전시규모와 물적인 풍부함을 자랑했다는 점에 있다. 조선 뿐 아니라 만주, 대만 훗카이도, 일본 본토에 이르기까지 출품과 선전의 범위는 제국 일본의 판도를 망라하였고, 50여 일 동안 개최되어 당시로서는 상당한 재정과 인원, 물량이 동원되었다. 뿐만 아니라 박람회장 안은 놀이기구, 불꽃발사, 전광판, 1인 곡예사 등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각종 스펙타클로 가득하였다. 회장 밖에서는 박람회를 선전하는 선전탑과 같은 화려한 건축 장식이 조영되고, 각종 문구와 선전포스터(광고)가 경성 시내곳곳을 장식하였다. 이렇듯 박람회는 제국주의, 소비사회, 대중오락의 세 가지 요소가 융합된 곳으로서, 대중이 근대의 상품세계와 만나는 최초의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12]
Ⅱ.2 조선박람회 기록물
박람회에 출품된 물품과 구성 및 내용은 남아있는 기록물을 통해 파악 가능하다. 다만 자료의 한계상 모든 내용에 대해 낱낱이 추적하기는 어려우므로 본고에서는 1차적으로 총독부 및 박람회 운영위 측에서 발행한 기록물 등을 참고하되, 전시장의 동선 및 기타 박람회 전시에 관한 내용을 다룬 연구논저를 참고하여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 조선박람회 관련 중심기록물은 주최측에서 발간한 『朝鮮博覽會記念寫眞』과 『(朝鮮博覽會)京城協贊會報報告書』이다. 『朝鮮博覽會記念寫眞』 는 조선박람회가 열린 이듬해 1930년에 조선총독부와 운영위인 경성협찬회가 공신 간행한 기념책자로, 조선박람회의 동선을 따라가며 박람회장의 풍경을 사진을 통해 재현하고 있다. [13]
포스터와 사진엽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인, 아시아인들의 풍속이나 상을 담은 사진을 유행시킨 것처럼, 일본에서도 조선의 이미지와 풍속을 담은 사진첩, 사진엽서 등이 유행하였다. 일본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각종 의례나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기념엽서를 발행해왔는데, 국가에서 발행한 기념엽서는 천황중심의 국가이데올로기를 시각화하고 확대 및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권혁희, 앞의 책, 109쪽.)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이후에는 식민통치의 성과를 선전하고 조선지배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담은 관제엽서로 발행하였다.
조선박람회기간 동안에도 박람회 개최를 기념하는 사진엽서 등이 대량으로 발행되었다. 조선박람회 당시 생산되었던 엽서는 박람회장 내 전시관의 모습을 재현하거나, 경성역, 남대문과 같이 경성시가지의 모습을 담아낸 사진, 여기에 기생의 이미지를 조합한 이미지가 주를 이루었다. 사진엽서에는 제목(caption)을 덧붙였는데 제목은 사진에 대한 정보를 문자로 제공함으로써 사진이 가진 불확실성을 보완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객관적 정보처럼 느껴지게 하는 효과를 가졌다. 사진엽서의 소재는 금강산, 불국사의 석가탑 등과 같이 당시 일본인이 호응했던 조선의 풍경 또는 유적지, 즉 명승지가 선택되었다. 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조선의 이미지를 기호화하여 사전에 경험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가하면 조선신궁(朝鮮神宮) 또는 조선총독부와 같이 식민지권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공간의 이미지가 함께 삽입됨으로써 조선의 식민지적 현실을 표상화하기도 하였다. 한편 엽서와 함께 조선박람회 포스터 등에도 번번히 등장하는 이미지는 한복을 입은 조선 여인(기생)으로, 조선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을 극대화한 것이었다.
Ⅱ.3 조선박람회 시설
박람회의 시설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는데 먼저 조선총독부가 직접 설치한 직영관 영역, 두 번째 일본의 각도에서 주관한 특설관을 비롯한 식민지관, 기업에서 운영한 기업특설관의 특설관 영역, 세 번째 연예관과 같이 유희와 유흥을 목적으로 한 협찬회가 운영하는 경성협찬회 운영시설 영역이 그것이다. 조선박람회의 동선은 1927년 이축된 광화문, 즉 경복궁 동측의 회장 정문에서 출발하여 한 바퀴를 돌아 놀이기구가 모여 있는 ‘어린이 나라’에서 끝이 났다. 조선총독부 간행, 건국대학교 아시아콘텐츠연구소 옮김, 『1929년, 조선을 박람하다. 조선박람회 기념사진첩』, 소명, 2018, 2쪽.
Ⅱ.4 출품물
조선박람회에서 조선에 관한 출품물은 대부분이 농수산업, 임업 또는 광업과 관계된 물품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그 내용이 1차 산업군에 머물러 있었다. 그 가운데 조선에 관한 출품물의 범위 안에 조선에서 거주하는 일본인’들도 해당 범주에 포함되어 일본인이 운영하는 회사와 사업체등의 상당수가 그에 참여하였다. 다만 조선의 것과 일본의 것이 혼합되어 제공되었지만, 정작 전시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전시물의 명칭, 설명 등은 모두 일본어로 되어있었다. 이는 조선적인 것과 일본의 것을 혼재한 가운데 일본문화를 확실한 우위에 두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박람회장을 둘러본 언론인 윤치호는 이 같은 전시구성을 보고 1929년 남긴 기고글에서 “만치 못한 조선 사람의 제품이 대개는 일본향으로 또 일본식으로 표현되어”, 이것들이 모두“일본서 건너온 것 갓치”보이고, 한편으로는 일본의 생산품이 혼합해서 진열되어 “실제로 현실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것만 같은” 의심을 들게끔 한다고 소회하고 있다. [14]
그의 말마따나 총독부직영관에서는 식민통치를 선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조선과 일본의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식민지적 현실을 무마하고, 내면화하려는 장치가 깔려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순수하게 조선의 출품물만을 다루어 단독으로 전시한 곳은 ‘미곡관’ 뿐으로, 이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미곡생산지로서의 인식을 단적으로 드러내었다. 전시내용 역시 조선에서의 미곡생산과 수리개척, 토지개량 등 식민지정책의 결과로 이룬 성과 등을 전시하여 식민지 미곡정책의 성과를 선전하였다. 전시관에서의 물산의 전시는 동일한 품목들로 구분된 물품군이 일정한 간격으로 진열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개별 상품들을 강조하기 보다는 상품군 전체를 부각하는 것이 목적 하에 이뤄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5] 대표적인 것이 미곡관에서의 조선쌀의 전시이다. 각 도의 명칭을 표시한 팻말과 함께 쌀을 단지에 담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진열하였다. </ref>
한편, 박람회장 내 전시관의 물품들은 이처럼 선전탑, 비행기, 군사용 포(砲)와 같이 마냥 ‘낯선 것’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쌀과 농산물, 면포 등 조선에서 생산된 물산, 지방의 풍광이나 풍년제, 농기구에 이르기까지 조선인 관람객들에게는 익숙할지도 모를 일상적인 사물들도 함께 전시되었다. 산업남관의 경우 쌀을 제외한 농산품·원예품·면업품·축산품·잠사업품·수산품·임업품과 등에서의 출품물을 진열하였다. 그리고 산업북관의 경우 가공품을 중심으로 염직·포백공업·제작공업·식료품 등의 공업생산품과 광산품이 진열되었다. [16]
Ⅱ.5 운영위:경성협찬회
경성협찬회는 조선박람회의 운영조직위로서, 각 도의 사업가와 회사들을 대표하는 조선인 상공업자들이 중심이 되어 1929년 8월 20일 설립되었다. 선전활동과 흥행사업을 중점으로 두고 운영하였으며 박람회가 종료될 때까지 총독부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였다. 개최당시인 9월에 이르면 총 인원 235명에 이른다. 경성협찬회의 보고서에는 박람회의 기획취지, 전시관 및 전시품목에 대한 열거, 그 외 박람회장 안에서 열렸던 부대행사와 재정 상황들을 망라하여 기록하고 있다. 박영효가 총재로 취임하고 1929년 3월 10일 임시사무소를 경성부청 4층에 설치하였다. 쿠기모도 이사장 및 각 담당 이사 아래 사무 준비를 전담할 사무촉탁과 사무원 3명, 급사 1명, 운전수를 채용했다. 4월 11일에 사무장을 채용했으며 5월 25일에 경복궁 내에 박람회사무국 건물이 완료되어 이리부를 경성협찬회사무소에서 활용하였다. 사무 업무가 증가하여 인력을 증원하였는데, 경성협찬회의 직원 129명에 각 기관의 파견인력 106명을 포함하여 총 235명이었다.
Ⅲ. 조선박람회 기록물의 메타아카이브 구현
데이터 수집 및 정리
온톨로지 설계 및 구축
Ⅳ. 데이터 및 아카이브의 활용
Ⅴ.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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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세봉 | 『동아시아 엑스포의 역사 : 메가 이벤트의 감성공학 』 | 산지니,2019 |
학위논문 작성시 유의사항
<reference>
- ↑ 김현규,「 3.1운동에 관한 개방적 연계데이터 구축」,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18
- ↑ 조선총독부관보
- ↑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 ↑ 국립중앙도서관 원문서비스
- ↑ 국립중앙도서관 원문보기 서비스
-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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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물관 소장품
- ↑ 안현정, 「일제강점기 시각매체와 조선미술전람회 연구 : 근대의 시각주체와 규율권력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54쪽
- ↑ 최석영, 『한국 근대의 박람회․박물관』, 서경문화사, 2001.
- ↑ 김태웅, 2002, 「1915년 경성부 물산공진회와 일제의 정치선전」, 『서울학연구』 제18호, 164쪽.
- ↑ 요시미순야, 이태문 역, 『박람회 : 근대의 시선』, 논형, 2005, 42쪽.
- ↑ -, 1929년, 조선을 박람하다. 조선박람회 기념사진첩, 건국대학교 아시아콘텐츠연구소, 2018, 2쪽
- ↑ 《신민(新民)》 1929년 11월호 53호
- ↑ 전민정, 「일제시기 조선박람회(1929년) 연구 - 조선인의 근대적 시각 체험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98쪽
- ↑ (「博覽會彙報」, 朝鮮173(1929), 331~33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