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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문학의 이해 중간고사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과 인문학의 결합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존재가 됐다고 생각한다. 디지털은 인문학에게, 인문학은 디지털에게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점차 하나의 디지털 인문학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4차 산업혁명, AI와 함께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문학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는 추세이다. 우스갯소리로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인문학은 우리 사회에 있어 그다지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디지털과 인문학이 결합하면서 인문학은 없어선 안 될 존재이고, 없어져도 안 될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디지털'과 '인문학'이 결합했다는 것은 두 요소 모두 우리 사회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현재 사회는 빠르게 발전해나가고 있지만, 이 발전 안에는 긍정적인 부분만이 존재하진 않는다. 사회·정치·세계적 문제 역시 존재한다. 이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나갈 수 있는 부분이 인문학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인문학 또한 디지털과 결합하면서 대중성이 강화됐다고 생각한다. 현재 사람들은 무엇이든 편하고 빠른 것을 추구한다. 터치 하나로 해결되는 세상에 사는 지금 복잡한 것은 피하고 본다. 수많은 문서가 디지털과 결합하지 못했다면 수많은 문서를 찾기 기능 없이 순서대로 하나하나 다 찾아야 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인문학 또한 디지털과 결합해 시간의 단축을 가져왔다. 기술에 발전에 따라 빠름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인문학을 접할 기회는 점차 감소하지만, 디지털 인문학의 등장으로 인해 디지털을 통해 인문학을 접할 기회를 늘린 것이다.
디지털과 인문학의 결합으로 우리의 곁에는 어느 하나 빠져서는 안 될 요소임을 알려준다. 디지털과 인문학은 혼자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닌, 상호 보완적으로 같이 나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창경궁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 공간도 비좁아졌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이다.[1]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 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고, 창경궁 터는 고려 말에 남경 천도를 계획하면서 궁을 세웠던 것으로 전하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자 세종이 상왕의 거처로 다시 궁을 지어 수강궁(壽康宮)이라 했으며 성종대 다시 궁을 지어 창경궁이라 이름 지었다.
우선 창경궁은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다. 공간의 구조와 배치도 경복궁처럼 평지에 일직선의 축을 이루도록 구획된 것이 아니라 창덕궁처럼 높고 낮은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언덕과 평지를 따라가며 터를 잡아 필요한 전각을 지었기에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2]도 언덕에 지어졌다.
창경궁의 또 다른 독특함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주요 전각들이 남향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점이다. 창경궁의 경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은 동쪽을 향하고, 관청 건물인 궐내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남쪽을 향해 있다. 남·서·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이다. 따라서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도 풍부하게 전해온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있다.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낮은 언덕을 지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이어져 본래 한 영역을 이루었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3]과 순조30년(1830) 대화재[4]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명정전은 국보로 지정되기도 했다.
창경궁은 국보1점(명정전), 보물7점(홍화문, 명정문 및 행각, 옥천교, 통명전, 풍기대, 관천대, 팔각칠층석탑), 등록문화재1점(대온실)을 소유하고 있다.

  1. 국보1점
    • 명정전
  2. 보물7점
  3. 등록문화재1점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계절별로 어떤 차와 음료를 마셨을까

각 전각의 음식을 만드는 부서로는 생과방(生果房)과 소주방(燒廚房)이 있었다. 생과방은 평상시의 수라 이외에 제호탕·잣죽·깨죽·낙죽 등과 각종 전과·식혜·다식·떡 등 음료와 과자를 만드는 부서로 잔치 음식의 다과류도 이곳에서 만들었다.

낮것상점심을 궁중에서는 낮것이라 한다. 평일에는 과일·과자·떡·화채 등의 다과반 차림을 하거나 미음·응이를 차린다. 장국상을 물리면 반드시 다과상을 올리는데, 보통 떡·과자·과일과, 음료로는 따뜻한 차나 화채·수정과·식혜 등을 계절에 따라 변화있게 마련한다.[5]

사계절이 뚜렷한 조선은 계절마다 특성을 살려 먹는 음식과 음료를 달리했다. 연세대본에는 교자상의 식단이 소개된 것이 특색이다. 특히 화채는 계절에 따라 변화있는 화채의 종류가 소개되었다.[6]
「규곤요람」(1896년)에 의하면 “2~3월에는 참 곶(참꽃, 진달래꽃)화채요, 4~5월'에는 앵도(앵두)화채요, 6~7월에는 복삼(복숭아)화채요, 8~9월에는 식혜에 국화 띄어 놓고, 동지석달(섣달)배숙이요, 넝니월(정이월)슈덩과라(수정과를 쓴다)” 고 하였다. 여름에는 색 만두나 할 수 있고 춘하는 수정과요 추동에는 배숙을 할 수 있고라고 한 것으로 보아 수정과는 정이월 음료, 춘하음료라 하였다. 조선시대는 시절에 따라 꽃과 과실을 이용한 음청류가 다양하게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7] 특히 봄과 여름 사이에 각 계절의 특색을 살린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
정조실록 46권, 정조 21년 5월 3일 임인 1번째 기사[8]에선 단오에 마시는 제호탕(醍醐湯)을 소개한다.

차대(次對)를 하였다. 내의원 제조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매년 단오에 각 전궁(殿宮)에 제호탕(醍醐湯)을 봉진하는데 중궁전(中宮殿)에는 봉진한 사례가 없기에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니 선조(先朝) 을미년년 이전에는 봉진하였는데 병신년 이후로는 빠졌습니다. 금년부터는 구례대로 봉진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정조실록 46권, 정조 21년 5월 3일 임인 1번째기사-

궁중 사계절 청음료
청음료
1~2월 수정과(水正果)
2~3월 참꽃 화채, 화면(花麵)
4~5월 앵두 화채, 제호탕(단오)
6~7월 복숭아 화채, 수단(水團)
8~9월 식혜(食醯), 유자 화채
11~12월 배숙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1. 첫화면
    •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을 대비해 국채보상운동이 무엇인지 간단한 설명 필요하다.
  2. 이미지
    • 이미지를 클릭 했을 때 설치 파일이 불편하다. 이는 설치 파일 없이 사진을 볼 수 있는 기능 추가와 함께 인터넷 쇼핑몰에서 활용하는 돋보기 기능을 추가하면 좋을 듯하다.
  3. 콘텐츠 보기
    • 스크롤 후 아카이브 검색하기로 가는 것이 아닌, 첫 번째 이야기에서 두 번째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다음 이야기 바로 가기로 개선이 필요하다. 이야기가 뚝뚝 끊어지는 느낌에서 국채보상운동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같다.
  4. 1907 KOREA
    • 1907 KOREA로 들어가면 대구 1907로 넘어가게 된다. 메인 페이지가 기존 국채보상운동 페이지가 아니다. 일관된 국채보상운동 페이지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
    • 네트워크 그래프의 표현은 좋지만 고정되지 않고 움직여 혼란을 주기에 고정시켰으면 좋겠다.
  5. 의연금 검색
    • 의연금 중 해외 의연금 검색하기 페이지 밑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다. 삭제 혹은 연결할 수 있도록 수정이 필요하다.
    • 의연금 검색 중 인물로 검색하기직업으로 검색하기는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이 모두 똑같다. 또한 직업으로 검색하기 분류에서 지역을 분류하는 곳에 이름으로 쓰여있다.

참고문헌

"「閨崑要覽」의 調理學的 考察" 문화재 no.15(1982) : 7-16.
"조선왕조 궁중음식(宮中飮食) 중 수정과류(水正果類)의 문헌적 고찰" 문화기술의 융합1, no.4 (2015):1-11.

참고사이트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탈
창경궁 관리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
쿠팡
위키 실록사전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각주

  1. 성종실록 152권 성종 14년 3월 3일
  2. 정조실록3권 정조 1년 5월 16일
  3. 인조실록4권 인조2년 1월 24일
  4. 순조실록31권 순조30년 8월 1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궁중음식(宮中飮食))
  6. "閨崑要覽」의 調理學的 考察" 문화재 no.15(1982) : 7-16.
  7. "조선왕조 궁중음식(宮中飮食) 중 수정과류(水正果類)의 문헌적 고찰" 문화기술의 융합1, no.4 (2015):1-11.
  8. 정조실록46권, 정조 21년 5월 3일